‘시나리오’대로… 고문 수사, 증거 기각, 최후 진술 조작, 시신 탈취

2012.09.14 22:11 입력 2012.09.14 23:30 수정

인혁당 재건위 사건

▲ 허위 조서에 고문 외면한 재판부
“정권 위기감에 권력층 입김 작용”

▲ ‘적화통일 기원’ 유언도 조작 발표
성당 향하던 시신 강제 화장까지

■ 고문으로 만들어진 인혁당 재건위

1974년 5월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인혁당계인 서도원, 도예종 등은 경북대생 여정남에게 ‘폭력에 의한 정부 전복을 선동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등 전국 대학생 조직을 결성토록 지령을 내렸다”며 “여정남은 이 지령에 따라 인혁당 서울지도부인 이수병, 김용원을 통해 이철, 유인태 등을 접선, 전국 봉기화를 위한 방법을 교시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의문사위원회와 국가정보원 진실위는 조사결과 “이는 허위 발표로 인혁당 재건위는 실체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국정원 진실위는 인혁당 재건위를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유신체제의 등장을 전후해 정세인식과 통일운동에 대한 의견 교환을 위한 서클 수준”이라고 판단했다.

의문사위는 중앙정보부에서 파견 경찰 등이 인혁당 피해자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몽둥이찜질, 물고문, 전기고문, 잠 안재우기 등의 고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피의자 신문조서, 진술서에는 피해자들이 조사받은 장소도 중정이 아닌 서울 중부서, 서울구치소(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로 허위 기재됐다. 인혁당 재건위 결성과 관련한 진술서 등은 고문에 의해 5월23일부터 이틀간 작성된 것으로 조사됐다.

고문에 관한 피해자들의 진술은 매우 구체적이다. 고 하재완씨는 상고이유서와 항소이유서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탈장됐으며, 탈항이 되고, 폐농양이 생겨 취조관이 시키는 대로 조서가 작성됐다”고 밝혔다. 고 김용원씨도 “중정에서 수사관들이 진술서를 꾸민 원본을 베껴 쓰라고 해 거부했더니 몽둥이질을 했다”며 “(수사관이) ‘시인해라, 재판은 우리가 하는 것이다. 부인하면 재판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처치해 버리겠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고 송상진씨 등은 고문을 한 수사관의 이름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고문사실은 당시 교도관, 검찰서기의 진술에서도 드러났다. 당시 수사 경찰은 자신들이 고문했던 사실을 부인하면서도 중정 수사관의 고문행위는 인정했다.

수사 경찰들은 피해자들이 검찰조사를 받을 때도 혐의를 부인하지 못하도록 감시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 조사의 내용과 다른 진술이 나오면 피의자들을 지하실로 끌고가 가혹한 매질을 해댔다. 당시 수사 경찰 나모씨는 2005년 국정원 진실위 면담에서 “검찰 조사도 중정에서 이뤄졌고, 피의자가 혐의내용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인혁당 재건위 사건 수사팀이 함께 조사했다”고 털어놨다. 공판조서에는 피해자들이 경찰·검찰 조사과정에서 부인했던 ‘인혁당 재건위 결성’ ‘정부 전복과 공산주의 국가 건설’ ‘민청학련 배후조종’이라는 혐의 사실을 시인한 것으로 기록됐다. 고문에 관한 기록은 모두 빠졌다. 재판과정에서도 변호인이 신청한 증인과 증거는 아무 이유 없이 전체 기각됐다. 피고인들은 고문, 협박당한 사실을 진술했지만 재판부는 증거조사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시나리오’대로… 고문 수사, 증거 기각, 최후 진술 조작, 시신 탈취

■ 시나리오에 의한 사형집행

1975년 4월8일 오전 10시. 대법원 민복기 재판장은 준비된 판결문을 10분 동안 읽은 뒤 인혁당 재건위 피고인들의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 선고했다. 대법원의 상고 기각결정이 내려지자 서종철 국방부 장관은 사형집행명령서를 작성, 비상고등군법회의 검찰부로 송부했다. 비상고등군법회의 검찰부는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수 8명의 건강이 이상 없다는 진단서를 받은 뒤 ‘형 집행지휘’를 서울 구치소로 보낸다. 9일 오전 4시55분 서도원씨를 시작으로 사형이 집행되고, 오전 8시50분 도예종씨를 끝으로 형 집행이 마무리됐다. 대법원 확정판결이 난 뒤 18시간 만에 일사천리로 일어난 일이다.

사형집행은 1973년 10월 제정된 군법회의법조차 위반했다. 군법회의법 제499조는 ‘상소권회복의 청구, 재심의 청구, 비상상고의 신청이 있을 때 그 절차가 종료될 때까지 기간은 사형집행기간에 산입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8명의 사형수들은 18시간 만에 사형 당해 재심 기회마저 원천적으로 박탈당한 것이다.

급박하게 사형이 이뤄진 것에 대해 이용택 중앙정보부 6국장은 2005년 국정원 진실위와의 면담에서 “통치권자나 집권세력에서 상당히 위험하다고 여겨 이 불씨를 빨리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는 “큰 사건의 판결이 났으니 법무부 장관이 빨리 보고하자 조기 집행하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고 밝혔다.

당시 한 교도관도 “사형 전날 퇴근도 못하고 대기하고 있었다”며 급박한 형 집행의 시나리오가 미리 짜여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했다. 국정원 진실위는 “권력 최상부층의 사전지시에 의해 사형준비는 물론 집행이 일사불란하게 이뤄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에둘러 표현했다.

■ 최후진술 조작과 시신 탈취

국정원 진실위는 사형집행명령부에 나와있는 피해자들의 최후 진술(유언)도 조작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사형집행명령부에는 도예종씨가 “조국이 하루빨리 적화통일되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됐고, 8명 모두 “종교의식을 거부한다”고 돼 있다. 유가족들은 “종교의식을 거부한다는 내용은 당시 가톨릭에서 구명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변조한 것”이라며 “ ‘적화통일 만세’라는 말도 중정에서 조작한 것”이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의문사위는 2002년 당시 교도관 김모씨를 통해 “도예종씨가 했다는 ‘적화통일’ ‘종교의식을 거부한다’는 등의 말을 들은 바가 없다”는 증언을 들었다. 다른 교도관들도 “종교의식을 거부한다고 말하는 것은 수명을 단축시키는 일이기에 상식적으로 맞지 않고,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

국정원이 2005년 당시 교도관을 면담한 결과, “인혁당 재건위 관련 사형수들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유언 내용을 가족에게 통보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사형집행명령부를 작성한 이강준씨는 “도예종씨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하면서도, “도예종이 적화통일을 말했을 것”이라는 등의 앞뒤가 맞지 않는 진술을 했다.

조작된 최후 진술은 언론을 이용한 여론 공세의 도구가 됐다. 사형 직후 중앙일보와 조선일보는 ‘조국의 적화통일을 기원한다’는 진술을 보도하면서 사형의 정당성을 밝혔다.

사형집행 이후 일부 시신은 강제 화장됐다. 경찰은 사형집행 다음날인 10일 서울 응암동 성당으로 향하던 송상진씨의 시신을 놓고 유가족과 4시간20분가량 승강이를 벌이다 결국 크레인을 동원해 영구차를 화장터로 옮겨 화장했다. 국정원 진실위는 “시신이 강제로 화장된 것은 천주교 성당에서 장례를 치를 경우 전격적인 사형집행을 계기로 국민의 분노가 표출되는 사태를 예방한 조치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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