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로사 활동가’ 집담회 “개인 탓으로 치부되는 과로사, 업무상 재해 입증도 버겁다”

2019.10.29 22:12 입력 2019.10.29 22:14 수정

한·대만·홍콩 등 동아시아 ‘과로사 활동가’ 집담회

‘제17회 아시아 직업 및 환경 피해자대회’에 참가 중인 한국·대만·홍콩 노동 활동가들과 과로자살로 동생을 잃은 장향미씨(오른쪽)가 29일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경향신문과 집담회를 열었다. 왼쪽부터 정추링(대만)·시우신만(홍콩)·황이링·린수전(이상 대만)·최민·리우니엔윤(대만)·장씨.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제17회 아시아 직업 및 환경 피해자대회’에 참가 중인 한국·대만·홍콩 노동 활동가들과 과로자살로 동생을 잃은 장향미씨(오른쪽)가 29일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경향신문과 집담회를 열었다. 왼쪽부터 정추링(대만)·시우신만(홍콩)·황이링·린수전(이상 대만)·최민·리우니엔윤(대만)·장씨.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장시간 노동과 이로 인한 과로사·과로자살 문제는 비단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전 세계 국가들 가운데 늘 긴 노동시간 면에서 최상위권이다. 개인보다 조직을 중시하는 문화, 노동권에 대한 열악한 인식, 낮은 노조 조직률 등이 공통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최근 탄력근로제 등 노동시간 유연화 제도를 확대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일본·대만·홍콩 등에서 과로사 문제에 대항해 온 동아시아 활동가들은 28일부터 30일까지 서울에서 진행되는 ‘아시아 직업 및 환경 피해자대회’에 참가 중이다. 한국에서도 활동가와 과로사·과로자살 피해자 유족들이 함께했다. 유족 중에는 지난해 1월 과로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민순씨의 언니 향미씨도 있었다. 온라인 강의업체 ‘에스티유니타스’에서 웹디자이너로 일하던 민순씨는 생전 밥 먹듯 야근을 했고 상사의 괴롭힘에 시달렸다. 하지만 회사는 고인이 앓고 있던 우울증이 죽음의 원인이라며 책임을 떠넘겼고, 유족들은 과로자살임을 입증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지난 16일에야 근로복지공단은 고인이 업무상 재해로 사망했다고 인정했다.

29일 장향미씨와 한국·대만·홍콩 활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경향신문과 집담회를 했다. 집담회에는 대만 ‘OSH 링크’ 활동가 황이링·정추링, 대만 ‘TAVOI’ 활동가 리우니엔윤·린수전, 홍콩 ‘ARIAV’ 시우신만이 함께했다. 황이링은 2015년 대만 과로사 사례를 담은 <타이완, 과로의 섬>이란 책을 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장씨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최민 상임활동가가 자리했다. 장씨가 질문하고 활동가들이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이들은 죽음을 피해자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문화에서는 과로사를 근절할 수 없다며 가해자에 대한 엄격한 처벌만이 과로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법정근로 주 40시간인 대만
초과 근무해도 인정 못 받아

- 어떤 계기로 과로사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 궁금하다

황이링 = 대만에서는 1991년 과로사 관련 정부 지침이 만들어졌지만, 일터에서 사망해야만 과로사로 인정해주는 사실상 유명무실한 제도였다. 그러다 2010년 한 기술회사에서 일하던 29세 엔지니어가 집에서 자다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매일 12시간 이상, 어떤 날은 19시간까지 일하는 등 사망 전 6개월간 월평균 110시간 넘게 연장근로를 했지만 회사가 아닌 집에서 죽었다는 이유로 과로사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 사건은 대만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고 결국 과로사 지침을 개정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유족들을 도우면서 과로사 증명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 문제에 전문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6년 전 ‘OSH 링크’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 홍콩과 대만의 노동시간 제도는 어떻게 돼 있나.

시우신만 = 홍콩은 따로 노동시간을 규제하는 법이 없다. 정규직 평균 노동시간은 주 44시간인데 노동자 중 3%는 주 72시간 넘게 일한다. 20년 동안 개선을 요구해오고 있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

대만 노조 조직률 10% 미만
기업들이 노동자 압박해
탄력근로제 마음대로 도입

황이링 = 대만의 법정 근로시간은 주 40시간이고 연장근로는 월 최대 46시간까지 가능하다. 하지만 이보다 초과해 일하고도 노동시간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보편적이다. 간호사의 교대시간, 회사 소속 운전기사의 대기시간은 근로시간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런데 지난해 1월 일부 업종에 연장근로가 가능한 단위기간을 3개월(138시간)로 확대하는 법안이 도입돼 논란이 되고 있다. 이 제도는 세계 4위의 장시간 노동 국가인 대만에서 과로를 더 조장할 우려가 크다.

최민 = 한국에도 대만과 같은 ‘탄력근로제’가 있다. 한국은 이미 단위기간이 3개월인데 정부가 이를 6개월로 늘리려고 하고 있다. 과로는 사고위험과 심근경색·당뇨병·우울증 등 발병률을 높인다. 탄력근로제가 확대되면 주 최장 80시간 노동이 가능해진다.

리우니엔윤 = 노사가 서면으로 합의해야 탄력근로를 적용할 수 있다고 하지만 대만은 노조 조직률이 10%도 안되기 때문에 사실상 기업들이 노동자를 압박해 마음대로 적용할 수 있다. 대만 민진당은 선거 때는 과로를 금지하고 노동시간을 줄이겠다고 했지만 시민들은 집권 후 실질적인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지난 4월 숙련노동자의 노동시간에 제한을 두지 않는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가 시행되면서 앞으로 이들에 대한 과로사 인정이 굉장히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 동생이 죽었을 때 과로사·과로자살을 피해자 탓으로 돌리는 현실을 절실히 느꼈다. 유족이 과로사임을 직접 입증하는 것도 무척 힘든 과정이었다. 홍콩과 대만에서는 과로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떤가.

홍콩, 한 해 산재 사망 200건
이 중 절반은 인정 기준 미달

시우신만 = 홍콩에서는 과로사가 발생해도 정부가 지병 탓으로 결론내는 경우가 많아 법정 다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한 해 200여건의 산재 관련 사망이 발생하지만 이 중 절반은 인정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황이링 = 지난해 대만의 사용자단체는 “개인적인 지병일 뿐 대만에서 과로사는 없다”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과로로 인한 우울증은 개인 문제가 아닌 회사의 문제로 인정돼야 한다. 자신이 일하다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과로사임을 입증하기 위해 근무시간을 매일 기록해 둔다는 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리우니엔윤 = 대만에서는 한 버스기사가 사망한 사건에서 근로감독관이 1일 근무시간을 7.5시간이라고 조사했다. 하지만 가족 증언에 따라 계산해보면 그는 월 300시간 넘게 일했다. 정부는 결국 감독관 주장을 따랐다. 감독관 수도 너무 적어서 대만 기업 전체를 다 조사하려면 30년이 걸린다. 증거수집은 정부기관만이 할 수 있는 경우가 많은데 제대로 하지 않는다. 법이 더 강력하게 가해자를 처벌하고 관리감독을 철저히 해야 한다.

동아시아 대부분
개인보다 조직 중시 문화
노동권 인식 열악해

- 과로사가 왜 특히 동아시아에서 심하다고 보는가.

황이링 = 대만은 특히 청년층의 월급이 적어서 생활을 유지하려면 투잡을 비롯해 장시간 노동을 할 수밖에 없다. 또한 조직문화의 영향이 크고, 노동권에 대한 인식이 약하며, 노조도 약하다.

리우니엔윤 = 대만은 다른 나라의 주문자상표부착(OEM) 제품 생산으로 산업이 성장해 왔다. 싼 노동력이 핵심인 방식이다. 과거엔 오래 일해서 가족 경제라도 나아졌지만 이제는 많이 일해도 나은 미래를 보장받지 못한다. 일본에서 출근길에 지하철에 뛰어내려 목숨을 끊은 사건을 들었는데 한국도 비슷한 사례가 많은가.

가해자 엄격한 처벌만이
과로사 막을 수 있어

최민 =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살률 1위인데 이 중 30% 정도는 노동자로 추정한다. 이들 중 상당수가 일과 관련돼 자살하는 거라고 여겨지는데 아직까지는 1년에 산재로 인정되는 경우는 100명에 못 미친다. 한국은 지난해 과로로 인한 산재 인정 기준을 완화했는데, 법 개정뿐 아니라 정부가 이 같은 행정조치를 통해 산재를 적극 인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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