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성 획득이냐, 노동조건 개선이냐…길 찾는 플랫폼 노동

2020.02.18 22:22 입력 2020.02.19 15:21 수정

법 속 ‘근로자’라는 좁은 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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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 웹소설, 웹툰, 번역 등 플랫폼을 통해 계약을 맺는 노동이 계속 많아지는데, 노동법으로 보호받기 어려운 불안정한 이 노동자들을 어떻게 조직하고 보호할지가 우리의 고민거리다.”(나지현 전국여성노조 위원장)

경향신문이 만난 노동계 인사들은 공통으로 이 같은 고민을 토로했다. 정규직 중심 ‘공장제 노동’의 노사관계 모델이 무너져내리는 지금 노동운동은 현재·미래를 두고 논쟁 중이다. 공장제 모델에서 임금노동자는 근로기준법, 노동3권, 사회보장법을 다 누리는 반면 플랫폼노동자를 비롯한 나머지 ‘비임금노동자’는 노동권을 거의 누리지 못한다. 노동법상 ‘근로자’를 중심으로 노동권 보호와 사회복지가 설계된 현실에서 근로자 인정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기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정규직·공장제 노동 무너져내리는 지금
플랫폼 통한 ‘디지털 특고’ 등 늘어나
노동법 보호·사회복지 보장 어려워

한국 사회는 고용관계가 불분명한 업종 중 일부 노동자들에 ‘특수형태근로종사자’란 이름을 붙여 산재보험 등 제한적 보호 조치를 취해왔다. 박은정 인제대 공공인재학부 교수는 ‘월간 노동리뷰’ 2018년 2월호에 쓴 ‘특수형태근로종사자와 노동법적 보호’에서 “디지털기술의 발전과 함께 ‘특수형태근로종사자’보다 더 특수한 형태의 근로종사자들이 확산될 것이라는 예측이 팽배하다”며 “정규직과 구분할 때의 비정규직을 지금도 비정규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처럼 무엇이 ‘특수’한 형태의 근로인가에 대해 곧 의문을 제기할 시점이 도래할 수 있다”고 했다.

노동계에서는 해결 방법론을 두고 서로 다른 입장이 제기돼왔다. 20년 가까이 이어진 ‘특수고용노동자’(특고) 투쟁에서 택배·대리운전·퀵서비스 기사 등과 함께 다뤄져온 ‘라이더’(배달노동자)가 먼저 쟁점이 되고 있다. 기존 특고의 특성을 그대로 가지면서도 새롭게 플랫폼의 외피를 입은 노동을 ‘디지털 특고’라 부른다. 라이더유니온은 기존 노동법으로 보호받기 어려운 ‘회색지대’에 대한 별도 보호 조치를 논하기 전에 현행 법률로 노동자로 인정받아야 하는 이들이 자영업자로 잘못 분류되고 있는 문제부터 시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민주노총 서비스연맹은 개별 노동자의 ‘근로자성’ 인정 여부에 집착하기보다 사회적 대화를 통해 조금 낮은 수준이라도 노동시장 전반을 규율하는 ‘규칙’을 만들어야 관련 노동자 모두의 노동권이 보장될 수 있다고 본다.

■ “있는 법부터 준수” “규칙 확립 먼저”

서비스연맹은 지난해 11월 배달의민족 등 플랫폼기업들이 속한 코리아스타트업포럼(코스포)에 배달노동자 노동권 보호와 시장질서 확립을 위한 표준약관, 표준계약서 체결 등을 논의할 사회적 대화를 제안했고 코스포가 받아들였다. 사회적 대화 기구는 노사정 및 전문가 대표가 각 3명씩 참여해 ‘플랫폼노동 대안 마련을 위한 사회적 대화 포럼’이라는 이름으로 이달 말 출범한다. 라이더유니온은 사회적 대화에 참여할지 내부 논의 중이다. 제안 당시 라이더유니온은 ‘배달노동자의 지위는 거래될 수 없다’는 제목의 성명을 내 “표준계약서 체결은 플랫폼기업의 위장도급 행태를 눈감아주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 무렵 고용노동부는 음식배달 앱 ‘요기요’와 개인사업자로 계약을 맺은 라이더유니온 소속 라이더 5명이 “체불임금을 지급해달라”며 낸 진정에 이들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했다. 서울시는 서울 지역 라이더유니온을 합법노조로 인정했다. 모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라이더유니온이 사회적 대화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구교현 라이더유니온 기획팀장은 “라이더 위장도급 문제가 불거지는 시점에 표준계약서를 쓴다는 것은 라이더를 노동자가 아닌 제3의 범주로 규정해버린다는 점에서 위험하다”며 “사측이 불법행위를 사과하고 대책을 세워야 하는 상황에서 사측 손을 들어주는 꼴”이라고 말했다. 그는 “라이더가 개인사업자임을 전제로 대책을 만들게 되면 노동자로서 권리는 명백히 제한된다”며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범주를 어떻게 넓혀 더 많은 노동자가 적용받을 수 있게 할 것인가가 논의의 초점이 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근로자’로 인정받은 라이더와 같은 사례가 업계에 널리 퍼져 있다고 강조했다.

플랫폼 배달업계에 자영업자로 잘못 분류된 노동자가 많은 점은 서비스연맹도 인정한다. 다만 박정환 서비스연맹 정책국장은 “근로기준법상 근로계약이 굉장히 좁게 해석되는 상황에서 건건이 소송이나 진정으로 문제를 풀 수 없다”며 “사회적 대화를 통해 정부가 지침을 마련하면 시장은 이에 맞게 재편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박 국장은 2004년부터 현대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수십차례 불법파견 소송을 제기해 현재까지도 잇따라 승소하고 있지만 여전히 업계 전반의 불법파견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점을 그 근거로 들었다. 그는 “산업정책에 적극 개입해 노동자를 조직하고 이들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게 노동운동의 역할”이라고 했다.

플랫폼기업의 등장이 노동자에게 긍정적 역할을 할지에도 입장차가 있다. 박 국장은 “지역별 영세 배달대행업체들은 노동자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하지만 플랫폼기업들은 사회적 책임을 질 용의가 있다”며 “협상 파트너로 상대는 해볼 수 있겠다는 일말의 가능성이 생겼다”고 말했다. 반면 구 팀장은 “플랫폼기업이 축적한 노동자에 관한 빅데이터를 노동자 권리 보호에 활용할 수도 있지만 기업 덩치가 커지면 개별 대행업체에서 하던 자율적 권익 보호 조치조차 못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은 “논쟁은 노조운동의 방향성 차이에서 벌어졌는데 둘 다 새롭게 등장하는 노동 형태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입장”이라며 “라이더유니온이 ‘누가 진짜 사용자냐’는 원칙적 논의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그것이 압력으로 작용해 정부나 사측도 서비스연맹이 주도하는 사회적 대화에 서둘러 참여하려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 가사근로자법을 둘러싼 입장차

노동계의 원칙론과 현실론의 입장차는 가사근로자법을 두고도 나타난다. 유급 가사노동은 플랫폼업체의 등장으로 더 보편화하는 분야여서 노동권 보호 대책 마련이 절실하지만, 1953년 근로기준법 제정 이래 법 밖에 방치돼왔다.

정부가 2017년 발의한 뒤 국회에 계류 중인 ‘가사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 제정안’에 따르면 가사노동자는 업체에 직접고용돼 4대보험, 퇴직금 등이 보장되지만 ‘소정 근로시간’이 아닌 ‘실제 근로시간’에 따라 연차휴가·유급휴일 등을 갖게 되는 등 근로기준법을 느슨하게 적용받는다. 초단시간 노동기준인 주 15시간 미만 노동도 가능해 ‘0시간 계약’ 논란도 불거졌다. ‘제3의 영역’을 새로 만들어 제한적인 노동권을 부여하려는 것이다. 이에 “노동자 보호 조치가 전무한 상황에서 명확한 사회적 기준을 세워 의미가 있다”(서비스연맹)는 입장과 “한번 예외를 두면 그 예외가 일반화될 것”(라이더유니온)이라는 시각이 대립한다.

■ 플랫폼노동 보호 위한 각국의 시도

프랑스, 법상 플랫폼노동자 규정·보호
미, 기업 통제 안 받을 때 ‘독립계약자’로
독 ‘유사근로자’ 별도 범주로 법적 보호

플랫폼노동자 보호를 위한 노동자들의 요구는 각국에서 다양한 해결 방안을 제도화했다. 기존 법의 노동자 인정 기준을 넓힌 사례가 있다. 프랑스는 2016년 노동법에 플랫폼노동자를 규정하고 산재보험, 직업교육, 노동3권 등을 보장했다. 플랫폼기업에는 산재보험료와 직업훈련 분담금 등을 부담시켰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모든 노무제공자를 일단 노동자로 추정한 뒤 ‘기업의 통제와 지시를 받지 않는지’ 등 3가지 기준(ABC테스트)을 모두 만족시킬 때에만 ‘독립계약자’로 보는 내용의 AB5법을 올 초부터 시행 중이다.

반면 독일은 시간·장소의 지시구속성 등 사업주에 대한 ‘인격적 종속성’은 약하지만 전체 보수 중 일정액 이상을 한 사업주로부터 받는 등 ‘경제적 종속성’은 인정되는 노동자를 ‘유사근로자’라는 별도 범주로 포섭해 일정 정도의 노동법적 보호를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중앙·지방정부 차원의 법·제도적 해결 외에 노사정이 참여하는 해결책을 모색하기도 한다. 이탈리아 볼로냐시는 2018년 이탈리아 라이더유니온, 배달 플랫폼사, 시의회가 참여한 ‘도시 디지털 노동권의 기본원칙에 관한 헌장’을 발표했다. 같은 해 덴마크의 가사서비스 플랫폼기업 힐퍼는 플랫폼기업 최초로 노조와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단협에는 100시간 이상 일한 프리랜서에게 업체와 고용계약을 맺고 최저임금, 연금, 유급휴가, 실업급여 등을 적용받을 자격을 부여하는 내용이 담겼다. 스페인의 배달 플랫폼 딜리버루는 라이더들과 단협을 맺어 라이더 노동권을 보장했다.

<정대연·최미랑·심윤지 기자 ho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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