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변화, 기회와 위협을 구분하자”…‘산업 4.0’ 대하는 독일 노조의 자세

2020.02.18 22:38 입력 2020.05.06 16:21 수정
프랑크푸르트·베를린 | 심윤지·손제민 기자

독일의 최대 산별노조인 금속노조(IG Metall)는 ‘기술변화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형성해가는 것’이라는 믿음 아래 기술변화의 실체를 파악하고 기업과 국가 주도의 ‘산업 4.0’ 담론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독일 금속노조 제공

독일의 최대 산별노조인 금속노조(IG Metall)는 ‘기술변화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형성해가는 것’이라는 믿음 아래 기술변화의 실체를 파악하고 기업과 국가 주도의 ‘산업 4.0’ 담론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독일 금속노조 제공

석탄경제시대에는 광부를 필두로 한 노동자들이 에너지 생산의 주요 지점에 배치됐다. 노동자들은 자신이 캐고 실어나르고 기계를 돌리는 ‘고체’ 탄소 에너지원이 늘어남에 따라 점점 서로 연결됐고 단체행동으로 탄광, 철도, 발전소 등 작업장에서 힘을 발휘했다. 이렇게 조직된 노동자의 힘은 20세기 대중민주주의 출현에 기여했다.

석유의 등장은 이런 구조에 변화를 가져왔다. ‘액체’ 탄소 에너지원인 석유는 석탄에 비해 작은 규모의 작업장으로 충분했다. 노동자들은 지상에 남아 더 가까이에서 관리자의 감독을 받았다. 에너지 운송에 인간 노동이 덜 들게 됐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의 정치적 요구가 에너지시스템에 미치는 영향력은 현저히 약화됐다.

과학기술학 전문가 티머시 미첼은 저서 <탄소 민주주의>에서 주 에너지원이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되면서 노동운동이 약화된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 진행 중인 디지털 전환과 그로 인한 노동의 유연화는 화석 에너지원 전환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노동운동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노동자들이 한자리에 모이기는 더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법적인 ‘근로자’ 지위를 갖지 않은 새로운 형태의 노동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한 현실에 기반한 노동운동 모델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녹아내리는 노동’의 시대에 노동운동은 무엇을 해야 할까. 경향신문은 기술변화의 파급력을 일찌감치 실감하고 ‘노동 4.0’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독일 노동운동을 들여다봤다. ‘노동 4.0’은 정부 기업 주도의 ‘산업 4.0’에 대응해 2030년까지의 노동 세계 변화를 예측해 대비하기 위한 사회적 대화 모델이다. 독일의 1·2위 산별노조인 금속노조(IG Metall)와 통합서비스노조(ver.di) 관계자들에게 기술변화, 노동자 숙련·재교육, 조직화 등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 독일 노조 “변화는 우리가 만든다”…디지털화에 능동 대응

독일서 본 노동운동의 미래

‘페어튜브’(공정한 유튜브)라는 구호를 내걸고 유튜버 노조를 조직한 금속노조 크라우드소싱팀 관계자들. 독일 금속노조 제공

‘페어튜브’(공정한 유튜브)라는 구호를 내걸고 유튜버 노조를 조직한 금속노조 크라우드소싱팀 관계자들. 독일 금속노조 제공

독일 노조들은 ‘기술변화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믿음 아래 기술변화의 실체를 파악하며 ‘산업 4.0’에 개입하고 있다. 디지털 전환으로 심화하는 노동 유연화를 기회 요인과 위협 요인으로 구분해 기회는 확대하고, 위협은 줄이는 데 주력해왔다.

기술혁신 부정하지 않는 금속노조
노동자 재교육 꺼리는 한국과 달리
재교육 투자 등 대책 선제적 요구
서비스노조 “노동자 옵션 늘려야”

지난 12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난 독일 금속노조 노동의미래팀 담당자 모리츠 니하우스는 “우리는 디지털화, 혁신에 반대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 기술을 일터에 어떻게 적용할지, 노동자들은 그 변화 과정에 어떻게 참여할지에 있다”고 말했다. 이튿날 베를린에서 만난 서비스노조 미카엘 피셔 정책기획실장도 “디지털화는 그냥 일어나는, 자연적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형성해 나갈 수 있는 것”이라며 “디지털 기술은 노동자들의 노동강도를 줄이고 자유를 보장하는 기회가 될 수 있지만, 이러한 변화가 그냥 오지는 않는다. 우리가 어떻게 조직화하고 싸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다.

노조들은 2011년 앙겔라 메르켈 총리 주도로 시작된 제조업 혁신 정책인 ‘산업 4.0’이 낙관적 기술결정론에 치우쳤다고 보고 노동 쪽 목소리를 반영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노동이 배제된 ‘산업 4.0’ 담론을 비판하면서도 ‘기술혁신’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금속노조는 산업 4.0 논의가 본격화한 2014년 노동의미래팀을 만들고 자체 연구를 진행했다. 지난해 봄엔 2000개 가까운 사업장의 디지털화 수준을 조사하고 이를 시각화한 ‘전환 지도책’(Transformations Atlas)을 발표했다. 현장 노조 격인 각 사업장의 종업원평의회와 사측이 함께 참여한 조사에서는 노동자의 57%가 대체 가능성이 높은 직무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절반 가까운 기업은 이에 대한 전략이 아예 없거나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녹아내리는 노동]“기술변화, 기회와 위협을 구분하자”…‘산업 4.0’ 대하는 독일 노조의 자세 이미지 크게 보기

노조는 일자리 감소를 불러올 수 있는 스마트공장과 전기차 전환 대응에도 적극적이다. 2018년 ‘ELAB 2.0(전기차와 고용 2.0)’ 연구에서 노조는 2030년까지 7만5000개의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전망을 가장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로 설정하고, 급격한 고용 감소를 막기 위한 속도 조절을 요구하고 있다. 스마트공장과 관련해서는 개별 사업장의 자동화 단계와 고용 변동 예상치, 재교육 수준 등을 수치화한 ‘사업장 지도’를 제작 중이다. 노조는 이러한 자료들을 토대로 기업들의 노동자 재교육 투자를 비롯한 대책 마련을 적극 요구하고 있다.

서비스노조는 디지털 기술이 노동자들의 선택지를 늘리는 방향으로 적용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도이체텔레콤은 노동자들의 원격근무권을 보장하되 노동자들이 필요로 하는 경우 오프라인 업무공간을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의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동료들과 교류하고 종업원평의회와도 접촉할 수 있도록 1주일에 하루는 사무실 근무를 해야 한다는 단체협약을 맺은 사업장도 있다. 피셔는 “모바일로 일할 수 있게 하는 것과 모바일로만 일해야 한다는 것은 다르다”며 “노동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고 이에 맞는 다양한 옵션을 제공하는 게 디지털화된 사회에서 노조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했다.

■ 노동자 재교육에 선제적 대응

기술변화는, 특히 제조업의 경우 기존 공정에 적응해온 노동자들의 숙련을 무력화하고 고용 감소로 이어지기 쉽다. 고용 유연화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노조는 재교육 필요성을 직시했다.

니하우스는 “사용자들은 기술변화를 인력 줄이기에 활용하려고 한다. 우리는 ‘안된다. 아직은 괜찮다. 사람들을 재교육하면 된다’고 얘기한다”며 “다만 디지털화나 전기차 전환에서 필요한 교육은 작업장에서 이뤄지는 상시적인 숙련교육 수준이 아니라 3개월 정도 현업에서 떠나거나 6개월가량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직업고용센터 교육을 받는 보다 큰 개념”이라고 말했다.

금속노조는 디지털화로 인해 가능해진 원격근무 기회를 살려 2015년 ‘숙련화와 재교육에 대한 단협’을 체결했다. 단협에는 신기술로 가능해진 노동의 시공간적 유연성이 경영전략 차원으로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일과 생활의 조화가 이뤄지는데도 활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됐다. 이는 노동자가 원할 경우 노동시간을 2년간 주 28시간으로 줄이는 것을 요구할 수 있는 노동시간 단축 정책인 ‘시간선택제’와 맞물려 이뤄졌다. 재교육 비용은 정부와 기업이 분담한다.

이런 모습은 한국의 기성노조가 기술변화에 거의 개입하지 않고 회사의 숙련·재교육 투자에도 부정적 태도를 보여온 것과 대비된다. 홍석범 전국금속노조 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금속노동자의 일자리 인식과 노동조합의 과제’ 보고서에서 “지금까지 우리나라 노동조합들은 회사의 숙련 투자를 장려하기보다는 스스로가 숙련회피 전략을 택하거나 숙련 투자에 부정적 태도를 갖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며 “노조도 숙련 지향적인 작업장 체제를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비스노조는 조합원들이 받는 기술변화의 영향이 다르지만 재교육을 강조하기는 마찬가지다. 피셔는 기술변화로 금융 분야 일자리가 줄어들고, 보건·서비스 분야에 새 일자리가 생겨나는 점을 거론한 뒤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몇년 후 정말 실업이 증가하고 새로 생겨나는 일자리에는 사람이 없어 곤란을 겪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단협을 할 때 재교육, 직업훈련을 명시하고 있다. 노동시간을 줄이는 대신 새로운 직업에 대한 능력을 키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금융노동자가 재교육을 받아 갑자기 돌봄노동자가 되는 것은 정말 힘든 도전”이라고 했다. 재교육을 잘하는 차원을 넘어 저평가된 돌봄 부문 급여를 올리고 모든 병원이 적용받는 구속력 있는 단협을 맺는 식으로 돌봄노동 처우 개선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 금속노조는 왜 유튜버 조직화에 나섰나

노조원 감소엔 독일서도 ‘위기감’
플랫폼·크라우드소싱 노동 주목
“유튜버, 보호받아야 할 자영업자”
금속노조, 노조 조직화에 힘 보태

노동운동이 강한 독일에서도 노조원 확보는 큰 숙제다. 금속노조의 경우 내연기관차가 친환경차로 대체되고 생산 방식이 디지털화하면서 조합원이 줄어들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있다. 2015년 플랫폼 경제에 대응하는 크라우드소싱팀을 만들고, 2018년 “노조운동과 거리가 먼 새로운 노동자의 조직화”를 ‘산업 4.0’ 대응 전략의 하나로 채택한 데 이어 최근 프리랜서인 유튜버들의 노조 조직화에 나선 데는 그런 배경이 있다.

유튜버 노조 움직임은 2018년 200여만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독일의 새총 관련 유튜브 동영상 제작자 요크 슈프라브가 자신의 콘텐츠가 아무런 설명 없이 삭제되고 광고수익이 끊어진 데 항의하며 촉발됐다. 슈프라브는 유튜브에 해명을 요구했지만 인공지능(AI)의 자동응답 외엔 설명을 듣지 못했다. 그는 페이스북에 ‘유튜버 노조’ 커뮤니티를 만들고 항의 시위를 조직했다. 금속노조는 슈프라브와 비슷한 처지의 유튜버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조직화에 힘을 보탰다. 유튜브는 거대 노조가 가세하자 비로소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금속노조 크라우드소싱팀 담당자 로베르트 후스는 지난해 12월 통화에서 “플랫폼(유튜브)이 과도한 힘을 가지고 있고, 그 플랫폼에서 일하는 사람들 요구에 제대로 응답하지 않았다”며 “유튜버들은 모두 고립된 채 일하고 있어 비슷한 일을 겪어도 집단행동을 하기 쉽지 않다. 우리 노조는 마침 플랫폼과 크라우드소싱 노동에 관심을 기울여왔기 때문에 유튜버 노조 조직화를 돕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유튜브의 광고 배당을 주 수입원으로 하는 유튜버들은 새 동영상이 잘 보이는 위치에 걸리지 않으면 순위에서 밀리고 점점 수입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종속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노사관계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자영업자 지위로 볼 수 있다”며 이들의 법적 지위를 따지는 투쟁도 병행할 뜻을 밝혔다.

독일에는 150여만명의 ‘자영업 노동자(self-employed)’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프리랜서 기자 등 3만5000명의 자영업자가 노조원으로 가입돼 있는 서비스노조는 점점 늘어나는 플랫폼노동 조직화를 위해 할 일이 많다고 본다. 피셔는 “자영업자라도 소득의 큰 부분이 한 회사에 종속돼 있다면 그 회사와 노동자들 사이에 단체협약을 맺도록 돼 있다. 우리가 정치에 요구하는 것은 이들 1인 사업자가 큰 회사들과 똑같이 반독점법 적용을 받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로서 함께 단협을 맺는 일이 더 용이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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