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세상

익명적 표현을 위한 변론

2009.02.01 17:17
황용석 | 건국대 교수신문방송학

[미디어 세상]익명적 표현을 위한 변론

익명성에 대한 우리 사회 일각의 부정적 시선은 사이버 논객 미네르바의 구속을 기점으로 극단화되고 있다. 미네르바에 대해 보수 언론은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숨기고 ‘가면 뒤에 숨은 범법자’로 그를 묘사했다. 제한적 본인확인제가 도입될 때도 이와 비슷한 시선이 팽배했다. 어느 학자는 인터넷 익명성이 우리 사회에 비겁자와 위선자를 양산해서 ‘복면사회’가 도래했다고 한탄했다.

과연 익명성은 사악한 것인가? 익명성은 인터넷의 특성이기 이전에 대중사회의 산물이다. 산업화 이후 대도시가 형성되면서 혈연, 계급, 신분 등으로부터 자유스럽고 원자화된 익명적 존재들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대중이다. 오늘날 도시의 삶은 대부분이 익명적이다. 익명성은 사이버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사회의 특성인 것이다.

익명성은 그 자체로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다. 익명성이 부정적 결과를 양산하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해로운 것으로 규정할 수 없다. 즉,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정당한 익명성과 해롭거나 파괴적인 목적의 익명성을 구분해야 하지만 해악의 범위를 가늠할 수 있는 명확한 사회적 합의가 어렵다. 해악적인 익명성을 규제하는 것은 정당한 익명성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익명성 자체를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치부하는 것은 인터넷상의 일탈행위 원인을 과도하게 단순화시키는 오류이며 익명성의 한 단면만을 강조하는 편협한 시각이다.

또한 익명성은 개인에게 주어진 고유한 헌법적 권리이다. 미국 법원의 판례와 유럽의 정책기조는 익명적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확대하는 데 두어져 있다. 최근 유럽 의회 ‘정보보호분과’가 발간한 ‘인터넷 프라이버시 - 온라인 정보보호에 대한 유럽의 통합적 접근’ 보고서에서는 “특히 공공 영역에서의 인터넷 익명성과 관련해서 ‘가상 정체성’(익명성)은 개인 정보의 보호와 그 오용에 대한 법률적 규제 사이의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대안적인 해결책”이라고 밝히고 있다.

익명성은 또 다른 헌법적 권리인 개인정보 자기결정권과 연결되어 있다. 익명적 표현의 자유는 일반 개인이 자신의 신원을 밝히지 않고 거래나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최근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프라이버시권이 중요하게 논의되면서 국가권력에 의한 전자감시 사회가 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국제적으로 국민의 개인정보와 프라이버시권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으며 그 같은 차원에서 익명성이 권리로서 강조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인터넷 공간은 완전히 익명적 공간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다수 인터넷 서비스가 실명 확인을 하고 있으며, 제도적으로도 제한적 본인확인제가 마련되어 있다. 즉,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말하는 익명성은 ‘추적 가능한 가명적 환경’이다. ID와 같은 가명적 커뮤니케이션을 허용하지만 그 행위자를 언제든지 법률적으로 추적가능하게 만들어져 있다. 이미 미네르바 구속 사태에서도 나타났듯이, 정보수사기관이 전기통신사업법 54조(통신비밀의 보호) 3항을 근거로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에게 이용자 개인의 통신자료의 열람이나 제출을 편의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인터넷에서의 표현과 거래 행위는 모두 기록되기 때문에 현실공간보다 인터넷 공간은 개인의 정체성이나 정보가 노출될 확률이 더 높다. 역으로 인터넷에서의 모든 행동은 감시되고 추적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의 인터넷 관련 입법 동향은 더욱 우려스럽다. 지난달 6일 황우여 의원 등 한나라당 의원 12명이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 내용 중에는 굳이 소송을 제기할 목적이 아니더라도 포털에 ‘악플러’에 대한 신상정보를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 담겨 있다. 신청인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인터넷 게시자에 대한 신상정보 공개요구가 남발할 수 있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이 법안은 인터넷 이용의 고유 특성인 ‘익명성’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며 개인정체성 및 개인정보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흐름은 세계의 보편적 경향과 어긋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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