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장도리... 박순찬 화백이 직접 뽑은 ‘장도리 10선’

2021.06.04 17:33 입력 2021.06.04 23:22 수정

1995-2021 촌철살인 4컷…박순찬 화백의 도전은 계속됩니다

굿바이 장도리... 박순찬 화백이 직접 뽑은 ‘장도리 10선’

경향신문 1995년 2월6일자를 들춰본다. “새 시사만화 장도리 오늘부터 연재.” 1면 사고(社告)이다. “신예 박순찬 화백 촌철살인 풍자”라는 작은 제목이 이어진다. 장도리 26년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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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2월 6일자 사고

익숙하면서도 낯선 박순찬이 보인다. 1994년 경향신문 최초의 만화가 공채로 들어왔다. 당시 만 25세. 이 신문 사상 최연소 화백이다. 연세대 만화동아리 ‘만화사랑’에서 노동운동 관련 만화와 유인물과 걸개그림을 그렸다.

사고는 “신세대 감각이 뛰어난 신인”이라고 소개한다. “평범한 봉급생활자 ‘장도리’를 주인공으로 하는 새 연재만화는 그날그날 우리 사회의 모습을 네 컷의 그림과 짤막한 대화 속에 압축시켜 독자에게 전달해드릴 것”이라는 글이 세로쓰기로 나온다. 23면 첫회로 이동한다. “자네 목욕 안 하나?” 때가 온몸에 묻은 한 인물이 “그런 일로 물을 낭비할 순 없죠”라고 답한다. 또 다른 인물은 “배 속에 있는 물도 버릴 수 없다”며 요의를 참는다. 난해하다. 박순찬은 “1994년부터 이어진 장기 가뭄으로 농축산업이 큰 타격을 받았다”고 한다. 다시 보니 시민들 고통과 농어민과의 연대를 녹이려 한 듯하다.

박순찬이 뽑은 '장도리 10선' 중 왼쪽부터 <1995.07.01 살려주세요>, <2006.11.02 말이 안 통해>, <2007.06.09 정신차려>, <2010.01.30 잔업>, <2010.10.08 면제와 아버지>

박순찬이 뽑은 '장도리 10선' 중 왼쪽부터 <1995.07.01 살려주세요>, <2006.11.02 말이 안 통해>, <2007.06.09 정신차려>, <2010.01.30 잔업>, <2010.10.08 면제와 아버지>

박순찬은 초기 주로 사건·사고에서 소재를 찾았다. 정치권력 비판도, 자본권력 비판도 쉽지 않았다. 김영삼 정권 때다. 경향신문은 한화 계열사였다. ‘재벌언론’에서 ‘재벌’이라는 단어는 금기였다. 박순찬은 “대기업이라고 쓰지 않으면 편집국장이 몹시 불편해했다. 실제 압력도 많았다”고 한다.

전성기는 경향신문이 사원주주 회사로 전환하고, 독립언론을 표방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엔 권력층 압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피부로 느꼈다”고 했다.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에 대한 비판의 칼날을 벼려갔다. 박순찬은 시사만화가의 역할을 “포장을 벗겨내는 것”으로 정의한다. “정치권력이든, 재벌권력이든 위선적인 것들의 껍데기를 벗겨 실체를 보여주는 역할”을 중요하게 여겼다.

박순찬이 뽑은 '장도리 10선' 중 왼쪽부터 <2011.12.27 배운대로 한다>, <2011.12.29 내가 못나서>, <2015.04.07 빨갱이가 싫어요>, <2016.01.26 국부께서>, <2018.01.12 금수저 잭팟 대대손손>

박순찬이 뽑은 '장도리 10선' 중 왼쪽부터 <2011.12.27 배운대로 한다>, <2011.12.29 내가 못나서>, <2015.04.07 빨갱이가 싫어요>, <2016.01.26 국부께서>, <2018.01.12 금수저 잭팟 대대손손>

박순찬은 국가와 자본의 성장발전 이데올로기 비판에 적극적이었다. 시민 동원의 허구와 실상을 지적하고, 시대의 구호 이면을 드러내려 했다. 그중 하나가 삼풍백화점 붕괴(1995년)를 두고 그린 작품이다. 외국인(백인으로 보이는) 관광객이 “한국 많이 성장했습니다”라고 말한다. 백화점은 ‘세계일류’ ‘세계화’ ‘선진국 진입’ ‘국민소득 일만불’이라 적은 현수막을 내걸었다. ‘KOREA’ 애드벌룬도 띄웠다. 뒷면의 붕괴 현장에서는 “살려주세요”라는 외마디가 새어나온다.

박순찬은 사태를 심층적으로 관찰한 뒤 ‘만화의 재미’라는 요소를 더했다. <진격의 거인> 같은 대중문화를 차용하면서 젊은층 호응을 이끌었다.

장도리의 ‘촌철살인’과 ‘해학과 풍자’에 대한 대중의 호응이 절정에 이른 건 박근혜 정권 때다. 2015년 경향신문 홈페이지 댓글란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가드(God)’와 ‘장도리’를 합성한 ‘갓도리’란 표현이 등장했다.

문재인 정권 들어서도 자본권력 비판은 여전했다. 정치권력에 대한 풍자가 약해지고, 불편부당함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장도리 26년’을 일관한 건 퍼스펙티브다. 박순찬은 줄곧 시민, 그의 표현대로라면 ‘민중’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사안을 바라본 퍼스펙티브의 장소는 청와대, 여의도, 주식시장이 아니라 광장, 공장, 재래시장이었다. 정치권력을 비판할 때 이 관점을 유지했다.

미디어비평가 김낙호는 <삽질공화국에 장도리를 날려라>(책보세)가 나왔을 때 이런 말을 했다. “포장마차의 샐러리맨 3류 책사들이 좋아하는 정치판 궁정사극 촌평에 전념하지 않고, 특정 사안에 대해서 실제 시민들이 지니는 이해관계의 틀로 바라보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박순찬, '나는 99%다', 2012, 120cmX96cm, 목재에 혼합재질 아크릴,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이미지 크게 보기

박순찬, '나는 99%다', 2012, 120cmX96cm, 목재에 혼합재질 아크릴,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박순찬, '흙수저의 길', 2012, 130cmX75cm, 목재에 아크릴 이미지 크게 보기

박순찬, '흙수저의 길', 2012, 130cmX75cm, 목재에 아크릴

박순찬, '지옥조선도', 2015, 60cmX60cm, 종이에 수채 이미지 크게 보기

박순찬, '지옥조선도', 2015, 60cmX60cm, 종이에 수채

2008년 제1회 ‘올해의 시사만화상’을 받은 작품(2008년 7월26일자)이 그중 하나다. 김낙호는 “일본 유력 인사의 독도 망언이 나올 때 다른 대다수의 시사만화들이 한국 국민의 민족주의적 감정을 대변하겠다는 듯이 그 인사를 모욕적으로 비난하기 바쁠 때, (장도리는) ‘독도는 우리 땅,나머지는 내 땅’이라는 풍자를 통해서 실제 시민들의 당장의 이해관계에 더 가까운 부동산 소유 집중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뭉크의 ‘절규’와 리히텐슈타인의 ‘기쁨의 눈물’로 시민의 고통과 권력층의 기쁨을 대비시킨 작품도 백미로 꼽았다.

지난달 24일 장도리 연재를 종료했다. 박순찬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경향신문에서 만화를 연재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어떤 성역도 용납하지 않고 노동자의 입장에서 공정을 추구하는 경향신문의 정신이 버팀목이 돼 자유로운 표현을 담은 장도리를 오래 이어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독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며 “작가의 역량 부족으로 변화를 갈망하는 시민 에너지의 강렬함을 세세하게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 것이 아쉽고 죄스러울 뿐”이라고 했다.

박순찬은 “지쳤다. 힘들다”고도 했다. 장도리만 부여잡고 살았다. 부서 이동도 없다. 물어볼 이도, 그림을 데스킹해줄 이도 없다. 뉴스를 분석해 어떻게 네 컷에 옮길지를 매일 고민했다. 초긴장 상태로 식은땀을 흘린 적도 많다. 그는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데서 기쁨을 찾으며 버텨왔다”고 말한다.

박순찬 화백의 장도리 이력

박순찬 화백의 장도리 이력

박순찬은 만화가였고, 만화가일 것이다. 당장은 책 ‘캐리커처의 비밀(가제)’ 작업에 집중할 것이라고 했다. 중단편도 그리려고 한다.

1995년 2월6일자 1면 사고는 “장도리는 우리 사회의 잘못된 구석구석을 찾아내 정의가 승리하고 인간미 넘치는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데 앞장설 것”이라고 했다. 그가 이 다짐을 실천하려 부단히 그리고 또 그린 사실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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