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빨리 한국 ‘디지털 조급증’

2006.09.01 18:18

#. 장면1

빨리 빨리 한국 ‘디지털 조급증’

인터넷으로 다운받은 영화를 즐겨보는 직장인 임모씨(29)는 몇년간 영화를 끝까지 본 적이 없다. 주연배우의 프로필이 궁금하면 즉시 영화를 멈추고 검색을 해야 직성이 풀리기 때문이다. 주요장면만 검색해서 10분 만에 한편을 보기도 한다. 임씨는 “최근엔 소설책도 결말이 궁금해 끝까지 읽지 못하고 건너 뛴다”고 털어놨다.

#. 장면2

‘싸이질’에 빠진 대학생 최모씨(24)는 미니홈피에 글을 올린 뒤 하루에만도 수십차례 접속한다. 방명록에 누가 글을 남겼는지 궁금해서다. 이마저도 답답해 최씨는 ‘문자메시지 알림기능’을 최근 신청했다. 방명록에 글이 뜨면 즉각 문자메시지가 날아오고 휴대전화를 통해 확인이 가능한 서비스다. 최씨는 “문자메시지가 오지 않으면 괜히 불안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대홍기획은 요즘 젊은 세대의 특징을 ‘퀵백(Quick Back)’이라고 이름붙였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을 보고 싶어한다는 뜻이다. 수단은 휴대전화나 메신저, 인터넷 등 디지털 기기다. 친구에게 메신저로 말을 걸었을 때, 애인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을 때, 인터넷으로 궁금한 내용을 찾을 때,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조바심과 짜증을 낸다.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 기질에 디지털 인프라가 더해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의 인터넷망과 최대의 휴대폰 보급률을 자랑하지만 한국인의 조급증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다. TV에서는 연일 더 빠른 인터넷 서비스를 개발했다며 ‘초광속(超光速)’ 인터넷망 광고가 흘러나온다. 포털들은 인터넷 이슈를 쫓아가야 한다며 ‘실시간 검색어’로 네티즌을 유혹한다.

빨리 빨리 한국 ‘디지털 조급증’

2004년 대학생 721명을 설문조사한 취업포털 파워잡에 따르면 ‘대한민국’하면 생각나는 것이 첫번째가 ‘빨리빨리’(23.7%)였고 다음은 정보통신(22.1%)이었다. 대학생의 절반 정도는 ‘조급증+IT’를 한국의 대표이미지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 조급증’은 이미 공기처럼 자각조차 힘든 게 현실이다. 최근 프랑스 파리에 회의차 방문한 연세대 신의진 교수(신경정신과)는 인터넷이 너무 느려 주최측에 항의를 했다. 그러자 주최측은 프랑스 정부가 3년전 전국에 초고속 인터넷을 깔자고 제안했는데 철학자와 아동심리학자, 의사 등이 크게 반대해 무산됐다고 밝혔다고 한다. 초고속 인터넷으로 인한 부작용이 확산될 가능성 때문이었다. 신교수는 “우리 국민 모두가 이렇게 빠른 인터넷이 필요하고 조급하게 살 필요가 있을까 다시 생각하게 됐다”며 “집에서 휴대전화 끄기·인터넷 안쓰기 운동이라도 벌여 디지털기기와 멀어지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디지털 조급증’의 이유에 대해 서울백병원 우종민 교수는 “디지털 기계의 발달로 개개인의 정보처리량이 늘면서 생긴 스트레스성 질환”이라고 진단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다보니 타인이나 자신을 위해 기다리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얘기다.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원인을 찾기도 한다. 문화평론가인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박기수 교수는 “IT기술의 발달과 조급증이 심화된 때는 외환위기 이후”라며 시점에 주목했다. 그는 “당시 고용보장이 무너지면서 성과지상주의가 나타났다”며 “이것이 더 빠르고 효율적인 디지털 매체 발달에 영향을 줬고 그것이 우리 습관·문화까지 지배하게 된 것”이라고 풀이했다.

디지털 조급증의 폐해가 심각해지면서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아가고 있다. 소설가 고원정씨는 컴퓨터가 없는 것은 물론 인터넷 사용법도 모르고 그 흔한 휴대전화도 없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남들이 한다고 따라해야 하는 것은 아니냐고 오히려 반문한다.

그는 “디지털 기술 발달로 인간 사이의 정에 바탕한 관계는 후퇴하는 것 같다”며 “사람들이 점점 조급하고 공격적인 성향을 띠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디지털 정보화 사회의 획일성에 불안감을 느낀다는 고씨는 디지털에 경도된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소설을 쓸 구상도 하고 있다. 그는 “전쟁이라도 일어나 통신망이 끊어지는 순간 인류는 저절로 몰락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글·김준일·김유진·임지선기자/사진·정지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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