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정 50주년 끝나지 않은 3가지 과제

2015.06.13 12:54 입력 2019.09.19 17:41 수정
이범준 기자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 동포, 원폭 피해자 문제… 한·일 해석 차이로 분쟁만 커져

일제 식민지 35년 청산을 다룬 한일청구권협정이 6월 22일로 체결 50주년이 된다. 하지만 해석의 불일치로 갈등이 봉합되기는커녕 분쟁만 커져 가고 있다. 정부가 손을 놓고 있자 두 나라 사법부가 전면에 나오면서 외교적 갈등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방치가 계속되자 한·일 양국이 조만간 있을 북·일수교를 위해 적대적 공생을 한다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1965년 6월 22일 한국과 일본 정부는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한일기본조약)’에 서명한다. 당시 4가지 부속협정에도 사인하는데 오히려 핵심은 이후 깊은 상처를 남기는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한일청구권협정)’이었다. 제2조 1항에는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명시했다.

한일청구권협정에서 한국은 전승국으로서 전쟁배상을 받은 게 아니다. 국가 분리에 따라 서로의 재산을 정리한 것이다. 원인은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정에서 조선이 전승국으로 참가하지 못한 데 있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이근관 교수는 “한·일 간의 전후처리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14조에 규정한 전쟁배상(war reparation)의 범주가 아니라, 4조가 예정한 식민 독립에 따른 재산관계의 정리, 국제법상의 용어로는 국가승계(state succession)의 문제였다”고 설명한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21조를 보면 ‘조선은 이 조약의 2조, 4조, 9조 내지 12조의 이익을 얻을 권리를 갖는다’고 나와 있다. 2조는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승인한다는 내용이고, 9~12조는 연합국과 관련이 많은 내용이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이전인 1949년 대일배상 요구조서에서부터 승전국의 입장을 주장했다. 전승국이고자 하는 초조함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이후에도 이어졌다. 일본군 출신인 박정희 정권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해 식민지 배상의 성격을 부여하고 홍보했다. 일본에는 피징용자 사망자·부상자·생존자 피해보상으로 3억6400만 달러를 제시했다. 결과적으로는 그나마 3억달러가 됐다. 반면 일본은 식민지 배상이 아니라 독립축하금 또는 경제협력자금으로 규정했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근거였다. 참고로, 두 나라는 기본협정에서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했는데, ‘이미’라는 애매한 표현은 각자의 이해를 위한 것이었다. 한국은 시작부터 무효라는 것이었고, 일본은 끝나면서 무효라는 것이었다.

1965년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조약 비준서에 서명하는 것을 정일권 국무총리, 이동원 외무 장관, 김동조 한일 회담 수석 대표가 지켜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65년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조약 비준서에 서명하는 것을 정일권 국무총리, 이동원 외무 장관, 김동조 한일 회담 수석 대표가 지켜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 전승국으로 배상받지 못해

별다른 논란이 없이 잠들어 있던 한일청구권협정이 논란으로 떠오른 것은 1990년대 들어서다. 위안부와 징용공 피해를 이유로 배상을 요구하는 개인들의 소송이 잇따랐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 1992년 부산지역 여자근로정신대, 1993년 일본 거주 송신도 할머니 등이 배상을 주장했다. 이어서 1995년 미쓰비시중공업 징용자, 1997년 신일본제철 징용공 소송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 소송들은 모두 지방재판소와 고등재판소를 거쳐 최고재판소에서 패소했으며, 주요한 이유는 한일청구권협정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사건마다 4가지 이유로 패소했다. 사실인지 확인되지 않는 문제, 옛 일본 헌법에는 국가배상 의무가 없다는 점, 청구시효가 지났다는 이유, 청구권협정에 따른 권리 소멸이다. 핵심인 마지막 이유는 한일청구권협정에 명시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라는 문구에 근거한다. 즉,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인 한국이 식민지 조선을 대표하여 최종적으로 청구권을 소멸시켰으므로 더 이상 청구권은 없다는 것이었다. 피해가 있다면 한국 정부에게 받으라는 것이었다.

개인들의 소송에서 박정희 정권이 한일청구권협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 정부가 식민지 배상이라고 주장했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민사소송은 한국인 개인과 일본 정부의 싸움이었다. 한일협정과 관련한 여러 소송을 이끌어온 장완익 변호사의 설명이다. “한국 정부는 식민지 배상이라는 반면 일본 정부는 채권정리라는 입장이었다. 일본 정부는 청구권협정으로 배상청구에 관한 국가의 외교적 보호권만 없어진다고 했다. 개인의 청구권리는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일본 국민들이 조선을 비롯해 외국에 남겨둔 재산이 적잖았는데 청구권이 없어졌다고 하면 국민들이 반발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국가가 나서서 일본 국민의 한국 내 재산을 찾아주지는 않겠지만 알아서 찾으려면 찾으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일본 국민이 피해자로서 벌인 소송에서 개인의 청구권은 남아 있다는 입장이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맺은 패전국이지만 일본 국민의 권리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이유였다. 1963년 일본인 원폭피해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에서 샌프란시스코협정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대한 청구권은 남았다고 주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 시베리아에 억류된 일본인들이 제기한 소송에서도 1956년 일소공동선언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소련정부에 배상요구가 가능하다고 했다. 일본 행정부는 이런 입장을 1990년대까지 유지했었다. 그러면서도 한국인들이 제기하는 위안부·징용공 소송은 막아냈다. 일본 정부의 ‘이중 플레이’이지만,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이란 독특한 한일청구권협정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은 2000년대 들어 개인 청구권도 사라진다고 갑자기 입장을 바꾼다. 한국인 징용공 피해자들이 일본에서 잇따라 패소하자, 관련 기업이 있는 미국에서 소송을 제기했는데 관할이 인정되며 소송이 시작된 것이 영향을 줬다. 부산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박배근 교수는 “미국인 일본군 포로가 캘리포니아주 북부지구 연방지방법원에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관하여 기존의 외교적 보호권만 포기한 것이라는 입장을 바꿔, 개인 청구권 소멸론으로 주장을 전환했다”고 설명했다. 야마모토 세이타 일본 변호사는 “일본인이 제기하는 소송과 외국인이 제기하는 소송에서 다른 입장을 보인 것은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것”이라고 최근 밝혔다.

한일청구권협정 논란이 계속되자 한국 정부도 박정희 정부의 입장을 전면 수정한다. 식민지 배상이 아니라 채권채무 해소 성격이라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2005년 “한일청구권협정은 기본적으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이 아니며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4조에 기초한 한·일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민관공동위원회를 만들어 밝힌다. 이로써 40년 만에 청구권협정을 둘러싼 한·일 양국의 입장이 뒤집힌다. 노무현 정부는 “청구권협정에도 불구하고 세 가지 문제는 포함되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사할린 동포, 원폭 피해자 문제”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 장완익 변호사는 “2005년 공개된 한국 측 회담문서를 보면, 박정희 정부가 개인 청구권에 대해 법률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얘기는 하지만 별다른 결론이 없으며, 무엇을 포기하고 남겼는지도 나와 있지 않다”고 했다. 결국 노무현 정부의 입장은 새롭게 정리된 선언에 가까웠다.

1965년 6월22일 일본 도쿄에서 한일기본조약과 4개 부속협정에 대한 조인식이 있은 뒤 서울효창공원에서 반대집회가 열리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65년 6월22일 일본 도쿄에서 한일기본조약과 4개 부속협정에 대한 조인식이 있은 뒤 서울효창공원에서 반대집회가 열리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헌법재판소 “해결 않는 것은 위헌”

한·일 양국 정부는 기존 입장을 뒤집으면서도 서로 간에 의견조율은 전혀 하지 않았다. 결국 각종 소송이 제기되면서 공은 사법부로 넘어간다. 2007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정치적으로 해결할 여지를 열었다. 일단 상대는 중국이었다. 중국인 강제노역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 니시마츠건설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국가 간의 행위에 의해 개인의 청구권이 실체적으로 소멸되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재산상 소구할 수 있는 권능은 소멸된 것”이라고 했다. 일본식 법률용어를 풀어 보면, 배상받아야 할 금전은 남아 있지만 소송으로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중국과 일본 역시 1972년 공동성명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중·일 양국 국민의 우호를 위해 일본에 대한 전쟁배상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밝혔었다. 결국 니시마츠는 화해의 형식으로 자발적으로 보상했다.

2011년 한국 헌법재판소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이 양국에서 해석상 불일치 상태인데도 정부가 이를 해결하지 않고 있는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정치적 해결을 촉구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로 이명박 정부가 일본과 관계를 진전시키지 못하면서 여전히 위헌 상태가 계속됐다. 이듬해인 2012년 대법원이 미쓰비시와 신일본제철 징용공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를 인용하면서 양국에 파문을 일으킨다. 대법원은 “원고들의 청구권은 청구권협정으로 소멸되지 아니하였으므로, 원고들은 피고에 대하여 이러한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징용 부분은 2005년 노무현 정부에서도 정리된 문제로 봤던 것이다. 다만 불법적인 징용은 다른 문제라는 주장도 있다. 이 사건은 원고 승소 취지로 파기돼 항소심으로 내려갔다가 대법원에서 최종 심리 중이다.

한일청구권협정은 50주년이 되지만 두 나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다. 1965년 냉전시대에 맺어진 낡은 조약이 그나마 서로를 불신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양국이 외교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사법부가 전면에 나서는 상황이 됐다. 일본에서는 “한국의 대법원은 청와대의 지배를 받는다”는 오해가 공공연히 나돈다. 사법시스템에 대한 불신은 경제투자를 위축시켜 경제를 어렵게 한다. 일부에서는 한국이나 일본이 1965년 협정을 유지하는 것은 앞으로 있을 북·일수교에서 북한의 이득을 원치 않는 공통의 이해가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북한에도 박정희 정부가 맺은 1965년 방식의 협정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한일청구권협정 3조 1항은 이렇다. ‘본 협정의 해석 및 실시에 관한 양 체약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하여 해결한다.’ 한일청구권협정 50주년인 올해 재해석을 하거나, 이 기회에 1965년 체제를 해소하고 새로운 협정을 맺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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