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생 사회…무너지는 인간관계…‘섬’이 된 사람들

2016.02.26 18:15 입력 2016.02.26 19:03 수정

초등생 지연이도, 대기업 박대리도, 직장맘 영희씨도 외롭다

열에 셋은 ‘도움을 요청할 사람 없음’ OECD국가 중 꼴찌

SNS친구 넘치지만 “외롭다” 언급, 4년새 10배로 늘어나

“당신은 마음을 나눌 진짜 친구가 몇 명이나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당신은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가. 만약 곧바로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면 당신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라 할만 하다.

행복의 원천도, 불행의 원천도 ‘사람’이다. ‘진짜 친구’는 그 존재만으로도 삶의 청량제다. 중년의 친구들이 포장마차에서 소주 잔을 기울이며 밝게 웃고 있다. / 경향신문 DB

행복의 원천도, 불행의 원천도 ‘사람’이다. ‘진짜 친구’는 그 존재만으로도 삶의 청량제다. 중년의 친구들이 포장마차에서 소주 잔을 기울이며 밝게 웃고 있다. / 경향신문 DB

각자도생의 시대를 헤쳐가야 하는 한국인의 인간관계와 사회적 관계망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속마음을 터놓고 고민을 나눌 사람 하나가 없어서, 누구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 지 몰라서, 섬처럼 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옆에 있다. 단체카톡방에도 있고 페이스북 친구 중에도 있다. 그들의 외롭고 고독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초등학생 지연이

“애들이 저를 좋아하지 않아요. 사는 거 재미없어요. 할 수 있다면 그냥 죽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초등학교 4학년생인 홍지연(가명·10)양은 외톨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지금까지 학교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명확히 말하면 왕따는 아니다. 하지만 말을 걸어주는 친구도 없었고, 지연양이 먼저 다가가지도 못했다. 밥도 혼자 먹었다. 같은 반 아이들끼리 키득거릴 때는 왠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의기소침해졌다. 특히 초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남자아이가 지우개를 던지며 짖궂은 장난을 친 후부터는 아이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지려 노력했다. 지연양은 “그냥 애들이 내가 뚱뚱해서 싫어하나보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외톨이 신세는 매일 두 세곳씩 다니는 학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집에 돌아와서도 혼자 숙제를 하거나 TV를 보거나 온라인 게임을 했다. 엄마는 늘 저녁 8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지연양은 영유아 시절 맞벌이하는 부모 대신 지방에 사는 할머니 손에서 컸다. 주말에만 엄마·아빠가 찾아왔다. 유치원에 입학한 6살 때부터 부모와 함께 살았지만 엄마·아빠는 늘 바빴다. 어쩌다 투정을 부리면 늦게 퇴근해 피곤한 엄마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묻는 일도 없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는 아이인가봐요”라고 말하는 지연양의 목소리는 풀이 죽어 있었다. 꿈이 뭔지 물어봤다. “나도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친구가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대답은 뜻밖이었다. 지연양은 지금까지 친구 맺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무한경쟁으로 치닫는 각박한 세상, ‘언제나 내 편인 친구’ 하나 없는 사람은 지독하게 외롭다. 한 남성이 홀로 정동길을 걷고 있다. / 경향신문 DB

무한경쟁으로 치닫는 각박한 세상, ‘언제나 내 편인 친구’ 하나 없는 사람은 지독하게 외롭다. 한 남성이 홀로 정동길을 걷고 있다. / 경향신문 DB

#대기업 입사 7년차 박석준씨

“회사에 들어가기 전까지 직장동료와의 관계를 만화 <미생>에 나오는 오과장과 장그래, 김대리와 장그래 같은 관계로 상상했던 것 같아요. 서로를 챙겨주는 끈끈한 동료애…. 현실은 전혀 다르죠. 서로 밟고 올라서야 하는 경쟁자일 뿐이에요. 매일 회의나 전화통화를 하지만 목적이 분명한 대화만 하다보니 집에 돌아오면 공허감만 남아요.”

대기업 입사 7년차 대리인 박석준씨(33·가명)는 “사회 초년생 때부터 조직문화에 크게 실망했다”고 말했다. 부서원이 몇날 며칠을 밤새워 만든 보고서를 팀장이 자기 성과로 가로채는 일이 다반사였다. 팀장은 회의를 거쳐 결정한 사항이 경영진 뜻과 다르면 순식간에 입장을 바꾼 뒤 책임을 실무진에게 덮어씌웠다. 박씨는 “입사 동기가 300명 정도였는데 1년도 안돼 그만둔 친구들이 꽤 있다”며 “업무강도가 센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조직 내 인간관계에 신물을 느껴 회사를 떠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옆자리 동료도 믿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술자리에서나 사적 대화를 나눌 때도 항상 입조심을 한다. 그는 또 “대화할 땐 항상 상대방에게 어디까지 말할 지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했다. 언젠가 스테이플러를 빌리러 동료의 책상에 갔다가 그가 미처 끄지 않은 메신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또 다른 동료와 자신을 흉보는 걸 보고는 누구를 믿어야 할지 충격을 받았다.

동료 간의 ‘소리 없는 전쟁’은 상대평가인 인사고과 시즌이 다가올수록 심해진다. 그는 고가시즌을 앞두고 ‘보여주기 경쟁’이 치열하다고 말했다. 박씨는 “성과를 내면 여기저기 알리고, 특히 팀장이 잊지 않도록 자주 상기시킨다”고 했다.

친구들과 뛰어놀 시간도 없는 아이들은 관계 맺는 기술을 배우지 못한다. 한 아이가 홀로 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 경향신문 DB

친구들과 뛰어놀 시간도 없는 아이들은 관계 맺는 기술을 배우지 못한다. 한 아이가 홀로 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 경향신문 DB

박씨에게 고교 동창 등 회사 밖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너나할 것 없이 바쁜 나이이다 보니 만날 틈이 없다. 그는 “하루중 가장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게 회사동료인데, 이런 살벌한 관계속에서 지내다보니 문득문득 외롭다는 생각을 한다”며 “그럴 때면 퇴근할 때 한 정거장 먼저 내려 무작정 걷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문화는 조직원 개개인의 문제라기 보다는, 조직이 조장하는 것 같다”며 “어느새 나도 이런 문화에 물들어가고 있는 듯해 씁쓸하다”고 토로했다.

#직장맘 송영희씨
인테리어 회사에 근무하는 송영희씨(30)는 남편과의 사이에 세살된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그는 “요즘 스트레스가 크다”고 토로했다. 아이가 순한 편인데다 파트타임으로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도우미 할머니도 있지만, 육아와 직장일 병행은 그 자체로 정신적·육체적 스트레스라고 했다.

그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남편과 아이가 잠든 늦은 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접속한다”고 말했다. 글도 올리고 다른 사람의 글과 사진도 본다. SNS 친구만 200명이 넘는다. 이 중 오프라인에서 관계가 있는 사람은 20명 수준이다. 송씨는 “친구가 중요한 것은 알지만 진짜 친구는? 글쎄요”라고 말했다. 대학 재학 때는 스펙 쌓느라 친구들과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웠고, 졸업한 후에는 마음에 드는 회사로 옮기기 위해 자격증을 더 많이 따느라 남편 외엔 친구를 만날 틈이 없었다.

그래서 찾은 출구가 SNS였다. 그는 “온라인 공간에서 해방감과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가 전공을 살려 예쁜 인테리어 소품으로 실내공간에 변화를 준 사진을 올리면 칭찬과 부러움이 섞인 댓글들이 올라온다. 그때마다 뿌듯함을 느낀다. 하지만 타인의 SNS를 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질투심과 우울감에 빠진다. 멋진 집, 해외여행, 수입자동차…. SNS 상에서는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사는 것 같고 행복해 보이기 때문이다. 송씨는 “특히 학교 다닐 때 나보다 공부도 못하고, 남자애들한테 인기도 없었던 친구가 좋은 집에서 너무 행복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내용들을 읽다보면 왠지 내가 불행하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고 말했다.

#이혼남 윤경준씨

“이혼 후 예전 친구들이나 지인들과는 연락을 끊었어요. 대화하다보면 제 이혼사실이 드러날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혼이 죄는 아니지만 공연히 뭔가 문제 있는 사람이라는 편견 어린 시선이나 동정받는 기분이 싫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 일에 관심도 많고, 참견도 많이 하니까요.”

여행업에 종사하는 윤경준씨(46·가명)는 2000년 결혼해 딸 둘을 낳고 2009년 이혼했다. 치과의사인 아내 몰래 아파트를 담보로 주식에 투자했다가 거의 전재산을 날렸기 때문이다. 아파트 처분 후 약간 남은 돈을 아내에게 주고 자신은 작은 월세집에서 산다. 월수입 450만원 중 매달 150만원을 자녀 양육비와 생활비로 보내고 나머지로 자신의 월세와 생활비를 충당한다. 그는 “요즘 여행업 경기가 안 좋다보니, 지금의 수입도 언제까지 유지될 지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처음엔 이혼사실을 말하지 않고 사람들을 만났는데, 주변에서 ‘치과치료를 해야 하는데 당신 아내의 병원에 가면 잘해줄 수 있느냐’고 묻는 등 곤란한 상황이 자꾸 생기더라고요. 아내나 아이들의 안부를 물을 때도 그렇고…”
옛 친구·지인들과 관계가 단절되다 보니 남는 것은 외로움이었다. 사람을 만나 밥 한 번 먹는 것도 다 ‘돈’인 터라,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는 약간의 돈이 모이면 혼자 배낭여행을 떠나고, 인터넷 여행동아리 사이트에 글을 올리면서 고독감을 잊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늘 허전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윤씨는 “마음을 터놓을 단 한 사람만이라도 있으면 지금보다는 나은 삶이 될텐데, 하는 생각을 문득문득 한다”고 말했다. 수입이 불안정한 그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재혼은 언감생심 꿈도 못꾼다”고 했다.

#대기업 퇴사한 베이비부머세대 최승현씨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주변을 챙기며 살지 못했어요. 엑셀레이터를 밟으며 열심히 일만 했는데, 돌이켜 보니 정작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을 놓쳤다는 회한이 듭니다.”

최승현씨(53·가명)는 국내 굴지의 건설업체에서 26년을 근무하다 재작년 퇴직했다. 예상치 못한 퇴직이었다. 죽을 둥 살 둥 밤잠 안 자며 열심히 일한 덕분에 국내외 대형 프로젝트를 맡아 현장을 누볐다. 그만큼 회사에서 두터운 신망을 얻었고, 자부심도 컸다. 협력업체 관계자 등 주변엔 늘 사람이 들끓었다. 부장이었던 그는 당연히 임원 승진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한순간 오너의 눈밖에 나면서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 최씨는 “일에 묻혀 가속만 하다가 갑자기 정지하니까 공황상태가 왔다”고 회고했다. 조직에 대한 배신감보다는 허망함이 컸다. 한동안 술에 절어 살면서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가까이에 답답한 마음을 토로할 친구는 없었다. 말없이 기다려주는 아내가 유일한 위로였다.

현재 관련업계에서 재능기부를 하며 살아가는 그는 “가장 후회되는 일은, 그동안 사람관계를 좀더 솔직하고 인간적으로 맺지 못한 것”이라고 토로했다.

“회사를 떠난 후 후배들의 전화를 받은 적이 별로 없어요. 제가 일을 우선시하면서 인간관계 맺기에 소홀히 한 결과겠지요. 돌아보면 저도 ‘진작 회사를 떠난 선배들께 따뜻한 안부전화 한번 왜 못했을까’ 하는 반성도 합니다. 좀더 가치 있는 삶은, 인생에서 남는 것은, 결국 사람인데 말입니다.”

한국인의 인간관계와 사회관계망 붕괴는 다양한 통계지표로도 확인된다.

지난 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조사한 ‘2015년 삶의 질 지수(Better Life Index 2015)’를 보면 한국인은 문제가 있을 때 도움을 요청할 친구나 친척, 이웃이 있느냐는 문항에서 조사대상국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있다고 답한 사람이 72%에 불과했다. OECD 국가의 평균 88%에 훨씬 못미친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사회지원망의 질이 점점 나빠진다는 점이다. 2013년에 80%였던 것이 불과 2년 사이에 8%포인트나 하락했다.

통계청이 지난해 12월 발표한 ‘한국의 사회동향 2015’에서도 ‘외로운 한국인’의 모습은 확연히 드러난다. 한국인(15세 이상) 중 56.8%는 여가 시간을 혼자서 보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가 시간을 혼자 보내는 비율은 지난 2007년 44.1%에서 12%포인트 이상 증가했다. 반면 친구와 여가를 보내는 비율은 같은 기간동안 34.5%에서 8.3%로 떨어졌다. 7년 새 무려 26.2%포인트나 줄어든 셈이다. 특히 15~19세는 73.3%, 20대는 71.1%가 여가 시간을 혼자서 보내는 것으로 조사됐다. 친구와 여가시간을 보내는 30대는 6.4%, 40대 5.9%, 50대 6.0%에 불과했다.

SNS에 외로움을 호소하는 이도 많아졌다. 빅데이터 분석업체 다음소프트가 지난 2011년부터 지난해 12월16일까지 블로그(5억6682만32건)와 트위터(79억2637만4169건)에 올라온 글들을 분석한 결과, ‘외롭다’는 언급은 4년 새 10배 이상 급증했다. 전체 감성어 중 ‘외롭다’를 언급한 비율도 2011년 4.07%에서 2015년 18.15%로 크게 높아졌다.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사회처럼 경쟁을 부추기는 각박한 사회분위기 속에서는 생존을 위해 저마다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상대가 적어지고 관계가 도구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며 “이같은 사회 관계망의 붕괴는 결국 개인의 삶의 질과 사회통합을 위협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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