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혈액형이 ‘AB형’인 그 놈…울산 단란주점 살인사건

2016.05.17 07:05

그림|김상민 화백

그림|김상민 화백

2001년 7월4일 새벽 2시가 훌쩍 넘은 한여름밤, 울산시 중구 옥교동 지하 단란주점에는 여주인과 아르바이트 여종업원만이 혹시 매상을 올려줄 손님이 올까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문을 열고 들어선 ‘그 놈’. 맥주를 주문해 마시는가 싶더니, 이내 여주인과 격렬한 실랑이를 벌였고 황급히 단란주점을 빠져 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여주인은 주점 바닥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고, 그와 5~6m 떨어진 곳에 여종업원이 피를 흘린 채 신음하고 있었다. 여종업원은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졌다.

이 사건으로 주점을 드나들었던 손님 중 신원이 확인된 사람들은 모두 경찰의 조사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경찰이 피해자와 용의자로 의심되는 주점 손님은 물론 피해자의 주변 인물을 대상으로 범인이 현장에 남긴 ‘흔적’과 유전자 대조를 했지만 일치되는 것은 없었다. 주점 손님 중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일부는 조사가 불가능했다.

경찰은 사건이 발생한 옥교동파출소에 수사본부를 차리고 1년여 가량 관할 중부경찰서와 울산경찰청의 전 형사를 동원해 수사를 벌였지만 범인의 꼬리는 잡히지 않았고, 지금까지 15년 동안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울산 옥교동 단란주점 여주인과 여종업원 피살사건이 발생한 2001년 7월 사건현장 위치도. │자료제공 울산경찰청

울산 옥교동 단란주점 여주인과 여종업원 피살사건이 발생한 2001년 7월 사건현장 위치도. │자료제공 울산경찰청

■주점에서 세어 나온 가냘픈 신음소리

사건이 발생하기 전날인 7월3일 오후 7시쯤 여주인 박미자씨(가명·당시 41세)는 평소 처럼 손님들의 안주감을 준비해 단란주점으로 출근했다. 낮시간이 긴 한여름철인데다, 손님들이 저녁식사를 겸한 술 한잔을 하고 날이 어두워진 뒤에야 단란주점을 찾는 경우가 많아 박씨의 출근시간은 다른 계절보다 조금 늦었다. 이어 손님들이 하나 둘씩 들어왔고, 오후 9시30분쯤 혼자 일을 하던 박씨에게 여종업원 김미숙씨(가명·당시 41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언니, 오늘 손님 많아? 내가 일 도우러 갈까?”

김씨는 박씨와 동갑이었지만, 박씨의 생일이 조금 빠른데다 주점의 손님이 많을때 일을 거들고 박씨로부터 약간의 일당을 받는 아르바이트 생활을 했기 때문에 박씨를 언니라고 불렀다. 김씨는 박씨와 통화한 뒤 30여분쯤 지나 단란주점에 왔다. 이후 손님이 늘면서 박씨와 김씨의 주점 일은 바빴고, 다음날인 4일 오전 2시가 넘어서야 조금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단란주점은 지하1층 지상 5층짜리 상가건물 중 지하에 있었다. 주점 내부에는 사방 벽면을 따라 설치된 간이 룸이 6개 있다. 또 중앙홀의 한가운데에 직사각형의 큰 테이블이 1개 있고, 홀 안쪽에 소형 원형 테이블이 1개 있었다.

당일 오전 2시50분쯤, 단란주점이 있는 건물 2층의 중국집 가게주인은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주점 안에서 나오는 신음소리를 들었다. 그는 단란주점으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 내부를 들여다봤고, 두 여성이 피를 흘린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섬뜩한 광경을 목격했다.

박씨는 중앙홀 큰 테이블 옆 바닥에 엎드린 채로, 김씨는 홀 안쪽 원형 테이블 옆 바닥에 천장을 보고 누운 상태였다. 박씨는 복부·등·머리쪽 5곳에 흉기로 찔린 상처가, 김씨는 배와 가슴쪽 4곳에 각각 찔린 상처가 나 있었다. 중국집 주인이 이들을 발견했을 때 김씨는 숨지기 직전이었고, “경찰에 신고해 달라”는 말을 남기며 마지막 숨을 헐떡였다. 신고를 받은 경찰과 소방이 현장에 출동해 김씨를 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그의 목숨을 건지지는 못했다.

여주인과 여종업원이 살해된 울산 옥교동 단란주점의 사건 상황도. │자료제공 울산경찰청

여주인과 여종업원이 살해된 울산 옥교동 단란주점의 사건 상황도. │자료제공 울산경찰청

■30분 사이에 발생한 살인사건

경찰은 사건발생 시각을 4일 오전 2시21분부터 중국집 주인이 박씨와 김씨를 발견한 오전 2시50분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김씨의 휴대전화 통화기록에서도 나타난다. 김씨는 당일 오전 2시17분 지인과 통화를 하면서 “지금 손님이 없다. 조용하다”고 얘기했다. 통화는 4분여 동안 계속됐다. 그러니까 최소한 오전 2시21분 이전까지 단란주점은 평온을 유지했다.

사건현장을 처음 목격한 중국집 주인은 당일 오전 2시10분쯤부터 40여분 가량 담배를 피우며 단란주점 주변 상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일부 구석진 곳에 술을 마시고 속이 불편해 토하는 사람, 너댓명이 비틀대며 어깨동무를 하고 어디론가 가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단란주점 입구에 3명의 남자들이 수군대고 있었고, 또다른 남자 1명이 서성거렸다. 잠시 뒤, 주점 내부에서 ‘이상한 소리’가 밖으로 세어 나왔다. 목격자는 그 소리가 궁금했고, 계단을 타고 지하로 내려가 주점 내부를 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주점의 중앙홀 바닥은 온통 피범벅이 돼 있었고, 여주인과 여종업원이 쓰러져 있었다. 여주인 박씨는 이미 주검으로 변해 있었고, 여종업원 김씨는 살아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 얼굴색이 흑빛으로 변했다.

울산경찰청내 미제전담수사팀 사무실 입구 │백승목 기자

울산경찰청내 미제전담수사팀 사무실 입구 │백승목 기자

■범행동기 밝힐 ‘시그널’은 여종업원의 허리띠

사건현장의 사진기록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중앙홀의 사각테이블 위에 3개의 맥주잔이 있고, 그 옆에 맥주병이 4개 있다. 3개의 술잔은 범인과 박·김씨가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특이한 것은 바닥에 쓰러진 김씨의 헐렁한 청바지에 맨 허리띠가 풀려 있다는 점이다. 박씨는 신발을 신은 상태였지만, 김씨의 신발 한쪽은 벗겨져 나갔다. 이는 범인이 박씨와 김씨를 살해하기 전에 성폭행을 시도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그러니까 범인이 먼저 성매매를 제안했고, 이를 거절한 여주인과 여종업원 사이에 벌어진 큰 실랑이가 살인사건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사건발생 초기 수사에 참여했던 한 경찰은 “박씨와 김씨는 각각 한 두 차례 이혼 경력이 있었지만, 남자관계가 복잡하지도 않았고 성매매 자체를 매우 금기시 할 만큼 깔끔하게 주점을 운영했다는 것이 그들을 아는 지인들의 얘기였다”고 전했다.

이를 토대로 사건당시의 상황을 가정해보자. 김씨와 성매매를 하고 싶었던 범인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강제로 김씨의 옷을 벗기려고 했고, 이를 본 여주인 박씨가 거칠게 범인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당황한 범인은 소지하고 있던 흉기를 꺼내 박씨를 마구 찔렀다. 사건현장의 사진자료에는 사각테이블의 테이블보가 흐트러져 있다. 박씨가 범인과 다투다 흉기에 찔린 뒤 쓰러지는 과정에서 고통을 느끼며 손으로 테이블보를 움켜쥐었고, 그때문에 테이블보가 뒤틀렸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 광경을 본 김씨는 사각테이블에서 홀 안쪽 원형 테이블쪽으로 물러났고, 그 과정에서 신발이 벗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성을 잃은 범인은 잔뜩 겁을 먹고 부들부들 떨고 있던 김씨에게도 망설임 없이 칼부림을 했다. 살인장면을 목격한 김씨를 범인은 가만둘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무슨짓을 했는지를 뒤늦게 깨달은 범인은 결국 흉기를 든 채 부랴부랴 현장을 빠져나갔다.

사건의 최초 목격자인 중국집 주인은 이 광경을 보지는 못했다. 목격자가 단란주점이 아닌 다른 상가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벌어졌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울산경찰청 장갑병 미제전담수사팀장이 단란주점 살인사건의 자료를 다시 살펴보고 있다. 두께가 10~15㎝인 당시의 사건자료는 모두  9권이나 된다.│백승목 기자

울산경찰청 장갑병 미제전담수사팀장이 단란주점 살인사건의 자료를 다시 살펴보고 있다. 두께가 10~15㎝인 당시의 사건자료는 모두 9권이나 된다.│백승목 기자

■단독범의 우발적 범행(?)···왜 지문 조차 없었나

수사초기 경찰은 용의자를 남성 3명으로 추정했다. 경찰이 당일 오전 2시까지 주점 중앙홀 사각테이블에서 술을 마신 4명의 손님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추정한 것이다. 사각테이블에 있었던 남성들은 경찰 조사에서 “(우리가) 주점을 떠나기 30여분 전에 세 명의 남자가 술집으로 들어왔고, 그들은 여종업원과 함께 홀 안쪽 룸에서 대화를 나누며 술을 마셨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울산경찰청 미제전담수사팀은 당시의 사건자료를 다시 분석한 결과 룸에 있던 3명의 남성이 언제쯤 주점을 나갔지는 불명확하지만, 용의자가 아닐 가능성이 짙다고 판단하고 있다. 여종업원 김씨가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인 당일 오전 2시17분 지인과 한 통화에서 “지금 손님이 아무도 없다. 언니랑 단 둘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는 경찰이 수사 초기에 용의자로 지목한 3명의 남성도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이미 주점을 떠났다는 것을 입증한다.

주점 내부에서는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지문이 없었다. 술을 마셨으니 당연히 술잔이나 술병에 지문이 남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문은 한여름철 주점의 맥주·술잔의 관리방법때문에 지워졌을 가능성이 크다. 시원한 맥주를 원하는 손님들을 위해 박씨는 맥주와 술잔을 냉장고에 보관했고, 손님이 올 때 마다 이를 내놨다. 당연히 일정 시간만 지나면 술병과 술잔의 겉쪽에 있던 성애가 물기로 변했고 이는 범인의 지문을 지웠던 것으로 분석된다.

울산시 중구 성안동에 위치한 울산지방경찰청 청사│백승목 기자

울산시 중구 성안동에 위치한 울산지방경찰청 청사│백승목 기자

■혈액형이 ‘AB형’인 그 놈이 바로 범인(?)

사건현장과 그 주변에는 범인을 특정할 수 있는 단서가 단 하나 밖에 없었다. 바로 지하 단란주점에서 건물 1층으로 통하는 계단과 그 벽면에 뿌려진 몇방울의 혈흔이다. 범인은 두 여성을 살해하는 과정에 자신도 신체 어딘가에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그것도 제법 큰 상처였다.

범인은 범행 후 되도록 빨리 계단을 통해 주점 외부로 달아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계단과 벽면 여러곳에 제법 많은 핏자국이 남아있었다는 것은 상처의 깊이를 짐작케 한다. 이 혈흔에서 나타난 혈액형은 ‘AB형’이었다. 숨진 박씨의 혈액형은 B형이었고, 김씨는 A형이었다. 살인사건 이외에 당일 단란주점 안팎에서 피를 흘릴만큼 큰 소란은 없었다는 것이 주변 상인들의 얘기였다. 이때문에 ‘AB형’의 혈흔 주인이 바로 범인일 가능성이 짙다.

하지만 당시 단란주점 주변에는 방범용 폐쇄회로TV가 없었다. 일부 상가들이 폐쇄회로TV를 설치하기는 했지만 단란주점 쪽을 비추지 않았고, 일부 주점 주변의 영상이 있다고 해도 화질이 워낙 좋지않아 범인의 모습을 전혀 알수가 없었다.

장갑병 울산경찰청 미제전담수사팀장(경위)은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들여다 보며 수사 초기에 누락된 부분이 없는지 꼼꼼히 살피고 있다”면서 “여종업원 김씨의 허리띠가 풀려 있었던 것은 출동한 소방관계자가 심폐소생술을 하기 위해 풀었는가 생각했는데 확인결과 그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전담수사팀은 또 범인이 처음부터 살인의 의도를 가지고 주점에 접근하지 않았을 것이며, 면식범의 우발적 범행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여주인 박씨의 지갑과 주점의 현금보관함에는 당일 영업으로 번 돈 136만4000원이 남아 있었다. 범인의 범행목적이 현금 강탈이었다면 이 돈은 남아 있지 않아야 한다.

전담수사팀은 범인은 원한에 의한 살인 또는 계획적인 살인도 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피해자에게 원한이 있거나, 계획적인 살인사건의 경우 범인은 2명 이상이 있는 곳에서 범행을 저지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범행이 쉽게 들통나기 때문이다.

장 팀장은 ”살인사건의 공소시효가 사라졌기 때문에 범인은 지금도 강한 심리적인 압박감을 느낄 것”이라면서 “범행동기를 어느정도 추정할 수 있는 만큼 성폭행 전과범의 소행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15년의 세월이 흘러 사건의 목격자 또는 사건 주변인들의 기억도 많이 흐려지고 있다”면서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는 제보가 있다면 수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관련제보는 울산경찰청 미제전담수사팀 (052-210-2772)으로 하면 된다.

다음 미제사건은 ‘인천 변방동 60대 여성 엽기 살해사건’입니다.

[미제사건, 시그널을 찾아라](28)광주 여대생 테이프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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