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천변따라 영영 가버린 내딸”...나주간호사 살인사건

2016.05.30 10:15 입력 2016.05.30 14:41 수정

먹구름에 장맛비가 계속되는데도 그날밤은 유난히 달빛이 좋았다. 나흘전 얼굴을 내밀지못한 보름달을 대신하는 듯 훤했다. 마을 앞 저수지에 반사된 빛까지 더해져 30여가구 산골 황치마을은 밝기만 했다. 2001년 8월18일 오후 11시30분쯤. 이 마을에 사는 이모씨(당시 52세)와 그의 딸(22)이 뭔가 옥신각신 입씨름을 하며 마을 앞 도로를 건넜다. 이어 딸이 이씨의 손목을 이끌고 50여m 떨어진 마을 정자 우산각으로 향했다.

“아빠, 엄마랑 좀 사이좋게 지낼 수 없어요? 아빠도 그러시지만 울 엄마도 농사짓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겠어요. 저가 돈벌어 잘 모실테니까요. 저기 개천(만봉천)쪽에 가서 얘기 좀 해요.”

하지만 아버지는 울면서 토해내는 딸의 하소연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술에 취해 있던 아버지는 “거기를 왜 가냐. 정자 쪽으로 가서 말하면 되지”라며 딸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딸은 더 이상 매달리지 않고 그대로 150m쯤 떨어진 만봉천 쪽으로 총총히 걸어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사건 현장] 피해자는 마을 앞 만봉천이 시작되는 곳에서 하류 3.2㎞로 떨어진 세지면 청용교 다리 아래서 시신으로 떠올랐다.

[사건 현장] 피해자는 마을 앞 만봉천이 시작되는 곳에서 하류 3.2㎞로 떨어진 세지면 청용교 다리 아래서 시신으로 떠올랐다.

■‘살림밑천’ 효녀딸 일주일만에 시신으로

딸은 그해 광주 모대학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나주 한 종합병원 정형외과 간호사로 취업했다. 병원 옆에 혼자 자취를 하던 딸은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집으로 와 농삿일을 도왔다. 야근을 마친 그날도 딸은 낮 12시 넘어 집으로 왔다. 저녁을 차려먹고 작은 방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던 중 아버지가 만취한채 돌아왔다. 어머니에게 큰 소리를 질러대던 아버지를 이끌고 마을 앞 개천으로 향했던 딸은 그날 밤 돌아오지 않았다. 잔듯 만듯 잠을 설친 부부는 아침에 급히 병원에 연락을 했으나 딸은 출근하지 않았다. 자취집에도 가봤지만 없었다. 바로 봉황파출소에 가출신고를 한 뒤 딸을 찾아 나섰으나 허사였다.

딸은 그날 부녀가 헤어진 장소로부터 3.2㎞ 떨어진 세지면 오봉리 청용교 다리밑에서 일주일만에 발견됐다. 25일 오전 8시30분쯤 이 마을 초등학생이 개천 풀더미에 걸려있던 시신을 발견하고 신고했다. 경찰이 건져올린 시신은 퉁퉁 불어 도무지 알아볼 수 없었다. 지문 대조를 한 후에야 딸로 확인됐다. 정말 든든한 ‘살림밑천’이 됐던 스물두살의 아까운 청춘. 딸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는 사실에 부부는 대성 통곡했다.

아버지 이씨와  딸이 헤어진 마을  정자 우산각  앞. 딸은 전봇대가 끝나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천변길을 따라 걸어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남지방경찰청 제공

아버지 이씨와 딸이 헤어진 마을 정자 우산각 앞. 딸은 전봇대가 끝나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천변길을 따라 걸어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남지방경찰청 제공

■처음부터 높은 벽에 막버린 수사

나신으로 나타난 딸의 시신은 심하게 부패해 있었다. 외상 흔적도 찾아낼 수 없고, 약물 등 독극물도 검출해낼 수 없을 정도였다. 시신에서 아무런 단서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달 30일까지 1000여명 넘은 인력을 만봉천에 배치, 입고 나간 반바지, 하얀티셔츠, 반지 등 딸의 흔적을 추적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딸의 친구, 직장동료를 살피고, 나주시내 우범자 등을 탐문조사했지만 혐의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신병을 비관한 투신자살 여부도 염두해뒀으나 스스로 옷을 전부 벗고 물에 뛰어들지는 않는다는 상식에 부딪쳤다.
애먼 아버지도 한 때 용의자 대상에 올랐다. 피해자와 최후에 만난 인물인데다 그날밤 부부간, 부녀간 갈등이 벌어진데 따른 돌발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의문을 풀어야 했다.
당시 아버지는 딸이 개천 쪽으로 가는 장면을 본 후 우산각으로 들어가 누워 잠이 들었다고 했다. 찬바람에 잠을 깨 곧바로 집으로 가니 0시20분. 그때서야 딸이 귀가하지 않은 사실을 눈치챘다고 했다. 하지만 개천을 따라 난 길로 내려가다 택시를 타고 나주시내 자취집으로 되돌아 갔을 것으로 봤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온갖 수사기법으로 아버지를 심문했으나 뚜렷한 혐의는 없었다.

이씨의 딸 시신이 발견된 청용교위에서 주민들이 인양을 준비하고 있는 경찰을 지켜보고 있다. 전남지방경찰청 제공

이씨의 딸 시신이 발견된 청용교위에서 주민들이 인양을 준비하고 있는 경찰을 지켜보고 있다. 전남지방경찰청 제공

■드디어 찾아온 ‘그 목소리’ 2개 단서
자살인지, 타실인지조차 가름할 수 없게 되면서 수사가 수렁으로 빠져들 조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사진도 시나브로 맥이 풀려가던 9월16일 오후 2시 수사본부로 한 여성의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지가 광주로 확인됐다.
“영산포에 사는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기로 하고 6월부터 동거를 하고 있는데, 그 친구가 살인을 한 지인을 만나고 왔다. 내내 몸을 부르르 떨고 몹시 불안해하고 있다. 아랫마을에 사는 아가씨를 목졸라 죽였다고 했다더라.”
신원을 밝히지 않고 전화를 끊었지만 오랜 가뭄의 단비처럼 수사진을 설레게했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12월19일 제보자(당시 26세)를 찾아냈다. 그는 제보 당시의 발언을 그대로 진술했다. 남자 친구(27세)도 경찰에 불려왔다. 고향 세지면에서 멜론농사 등을 지으며 나주시에 마련한 아파트로 출퇴근 하는 ㄱ씨였다. 그의 진술은 한층 구체적이었다.
“아홉살 많은 고종사촌 형이 간호사를 죽였다고 말했습니다. 피해자 집에서 위쪽으로 3㎞ 정도 가는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형이 트럭을 운전하며 달빛 훤한 천변 도로를 따라 올라가는데, 잘 아는 이씨 집 딸이 혼자 내려오는 것으로 보고 목을 졸라 죽였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옷을 벗긴 후 개천 풀섶 물속에 밀어넣고, 신발과 옷은 형 집 앞 냇가에 숨겨놨다고 했어요. 괴로워서 말했다면서 비밀을 지켜달고 했어요.”
이쯤되면 범인은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형만 찾아내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동생이 경찰서에 불려갔다는 말을 들은 형은 자취를 감췄다. 가족 수사과정에서 희생자 어머니로부터 딸이 집을 나간 이틀후 오전10시쯤 전화 한통화가 걸려왔다는 진술이 나왔다. 당시 충격을 받고 말할 틈이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누군가 전화를 해왔는데, 숨쉬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리딸이냐고 해도 대답을 하지 않고 끊었다”고 말했다. 또 하나의 단서가 될뻔 했지만 통화기록보관기간 6개월을 넘긴 탓에 무용지물이 됐다.

■유력한 용의자 고종사촌 형
ㄱ씨의 진술을 확보한 수사진이 그의 형(당시 35세)을 찾아나섰으나 벌써 종적을 감췄다. 영산포에서 이혼녀인 애인과 함께 건강원을 하고 있었다. 6개월여 추적 끝에 영광의 한 모텔에서 생활하고 있던 그를 찾아냈다.
1년 가까이 펴온 수사가 말끔히 갈무리될 것으로 기대됐다. 그는 당시 상해·폭력 등으로 전과가 10개나 됐다. 하지만 그는 동생이 털어놓은 진술에 대해 모두 부인을 하고 나섰다. 단지 동생한테 1000만원을 빌리기 위해 “교통사고를 내서 사람을 크게 다치게 했다”는 거짓말을 한 적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오히려 동생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되묻기까지 했다.
거짓말 탐지기 검사를 하자 거짓반응이 나왔다. 알리바이(현장부재증명)가 맞지않은 상황 등을 들이대며 혐의를 추궁했다. 하지만 이번엔 아예 말문을 닫았다. 일단 풀어주고 동생의 진술을 뒷받침할 증거물 확보에 나섰으나 여의치못하게 되면서 수사는 미궁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형은 그동안 서울 등을 떠돌다 주거지를 광주로 옮겨 노동을 하며 가정을 꾸리고 있다. 전과도 8개를 더하며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전남지방경찰청 청사 1층 왼편에 수사진 3명이 짜여진 미제사건수사팀이 자리하고 있다. 전남지방경찰청 제공

전남지방경찰청 청사 1층 왼편에 수사진 3명이 짜여진 미제사건수사팀이 자리하고 있다. 전남지방경찰청 제공

■처음부터 다시 시작
미제사건으로 분류돼 있던 이 사건은 올해 2월 전남지방경찰청 미제사건수사팀 3명이 넘겨받아 맡고 있다. 경찰은 여전히 형을 유력한 용의자로 올려놓고 있다. 하지만 관련 증거물을 전혀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라 아직 성과를 내지못하고 있다. 수사진 3명이 사건현장을 다시 누비고, 참고인 등 관련인물 주변을 훑으며 단서를 찾고 있다.
송창원 미제사건수사팀장은 “이 사건은 용의자가 범행을 자백한다 해도 물증을 찾지못하면 죄를 정확히 물을 수 없는 특이한 살인범죄”라면서 “국내 미제사건 가운데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사건으로 분류되지만 피해자 가족들의 피맺힌 한을 풀어드려야 한다는 소명감으로 발품을 팔고 있다”고 말했다. 사건제보는 전남지방경찰청 미제사건수사팀(061-289-2472). 다음 미제사건은 ‘제주 50대 소주방 업주 피살사건’입니다.

▶[미제사건, 시그널을 찾아라](31)충남 서천 카센터 방화 살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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