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다른 국적으로 살아가는 한국인이 묻다

2017.12.31 23:49 입력 2018.01.04 10:40 수정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한국 국적 김이향씨가 지난 24일 지난해 석사학위를 취득한 서울대를 찾았다. 그는 “나는 한국인들과 자라온 환경과 처지가 다른데도 한국 국적을 이유로 동일성을 강요받는다”고 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한국 국적 김이향씨가 지난 24일 지난해 석사학위를 취득한 서울대를 찾았다. 그는 “나는 한국인들과 자라온 환경과 처지가 다른데도 한국 국적을 이유로 동일성을 강요받는다”고 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의 주인은 누구일까. 이 나라는 국민의 것이라고 우리는 말해왔고 믿어왔다. 기본권의 주체를 국민으로 정한 대한민국 헌법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피플(people)과 인민(人民)을 인권의 주체로 정했다. 국민만이 인권의 주체라는 발상은 21세기에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1988년 현행 헌법으로 탄생한 헌법재판소는 국민에 외국인이 포함된다고 결정했다. 하지만 일상에서 국민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여전히 집요하다. 우리는 국민이라는 신화에 갇혀 있다. 여기 세 도시 세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이들은 국적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 묻고 있다.


■재일코리안 3세 김이향씨 “한국에서 나를 지키려면 일본 국적 받아야”

케이블 방송사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는 김이향씨(27)는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재일코리안 3세다. 대부분 재일코리안과 마찬가지로 초·중·고 모두 일본 학교를 졸업해 한국어는 배우지 못했다. 와세다대 재학 시절 졸업을 미루고 고려대에 교환학생으로 건너와 우리말을 처음 익혔다. 이후 2015년 한국인과 결혼한 재일코리안 여성들의 삶을 연구하려 서울대 대학원에 입학했다.

대학원 공부는 만만치 않았다. 한국어 전공서적을 읽는 데 남들보다 3배 이상 시간이 걸렸다. 새벽까지 도서관을 지켜가며 수업과 과제를 준비했다. 그러던 김씨에게 생각지도 못한 장벽이 나타났다. 영어시험 성적을 내야 석사논문이 통과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똑같이 일본에서 왔지만 국적이 일본인 학생들은 한국어 성적을 제출하면 됐다.

서울대 교무처는 “한국 국적 학생은 외국어 성적을, 외국 국적 학생은 한국어 성적을 내야 한다”고 했다. 이 학교 ‘대학원 논문제출 자격 외국어시험 시행지침’을 보면, 국적을 기준으로 외국인은 영어, 한국어, 제2외국어(모국어 제외) 중에 1과목 성적을 내야 한다. 다만 영어가 모국어인 경우에는 한국어나 제2외국어 중에서 내야 한다고 정했다. 그리고 모든 기준은 국적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 출생도 한국 국적이라면 영어 성적을 내고, 옌볜조선족자치주 태생 코리안은 중국 국적이라 한국어 시험을 쳤다. 그런데도 서울대는 “외국인은 한국어를 공부하도록 하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재일코리안의 모어(母語)는 일본어”라고 호소했지만 서울대는 거부했다. 이 학교의 논문제출 자격의 유일한 기준은 국적이고, 언어도 여기에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씨는 “일본 정부는 재일코리안의 한국 국적을 이유로 공동체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고 차별해왔는데 서울대의 입장은 이를 그대로 뒤집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한국인들과는 자라온 환경과 처지가 다르고 오히려 일본인과 같은데도 서울대는 한국 국적을 이유로 동일성을 강요했다”고 했다. 김씨는 논문 작성을 미루고 영어시험을 치러 지난해 여름 석사학위를 받았다.

일본으로 돌아가는 대신 한국에 자리 잡는 것을 김씨는 고민한다. 하지만 한국에 정착하기 전에 일본 국적으로 바꿀 생각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태어난 이곳에 살면서 이 땅을 사랑하게 됐고 내 삶도 걸어보려 한다. 하지만 그 전에 일본에 귀화할 생각이다. 아무리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어로 논문까지 썼지만 나는 한국인과는 다르다. 하지만 이런 이질성을 한국 국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한다. 한국에서 나를 지켜 살아가기 위해 일본 국적을 받아야 한다.”

미국 국적인 필리스 김이 지난 10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위안부기림비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그는 “위안부 문제는 세계가 주목하는 여성인권 문제”라고 했다.  샌프란시스코(미국) | 이범준 기자

미국 국적인 필리스 김이 지난 10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위안부기림비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그는 “위안부 문제는 세계가 주목하는 여성인권 문제”라고 했다. 샌프란시스코(미국) | 이범준 기자

■한국계 미국인 필리스 김 “미국시민으로서 위안부 문제 바로잡을 것”

지난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세워져 세계에 보도된 위안부 기림비는 한국계 미국인 필리스 김(49·한국명 김현정)이 적극적으로 관여한 작품이다.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김씨는 위안부 기림비 건립을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여러 차례 오가며 샌프란시스코시를 설득했다. 그는 “이 문제가 결과적으로 한국의 외교에 도움이 되는지는 몰라도 나는 여성으로서 그리고 사람으로서 전쟁범죄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지 한국인으로서 운동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1969년 광주에서 태어나 자란 김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21세이던 1990년 이모가 있는 로스앤젤레스로 건너왔다. 식당에서 서빙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지키면서도 저녁에는 학비가 저렴한 2년제 커뮤니티 칼리지에 다녔다.

이를 악물고 공부를 계속해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UCLA)을 졸업했다. 이후 법정통역사 시험에 합격해 대형 로펌과 함께 일했다.

“나는 내 의지로 미국까지 온 게 아니다. 가족의 결정으로 이곳에 온 것이다. 더구나 미국에 왔을 때 이미 20대 초반이었다.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당장 생활을 위한 영어조차도 배우기가 어려웠다. 정체성 고민으로 힘들었고 그러다 보니 주로 한인 커뮤니티에서 생활했다. 그렇지만 이미 떠나온 한국에 그렇게 관심이 크지는 않았다. 그런 내가 위안부 문제에 관여한 것은 오히려 일본계인 마이크 혼다 전 미국 연방의회 하원의원 때문이다.”

혼다 전 의원은 2007년 미국 연방하원에서 ‘위안부 문제에 관한 대일 사죄 요구 결의안’을 주도해 통과시켰다. 할아버지가 1900년 일본 구마모토현에서 이주한 일본계 3세다. 1941년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는데 이듬해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시작하면서 일본인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다. 그의 가족은 이곳에서 14개월을 보내고 캘리포니아 새너제이로 돌아가 딸기농장 소작농이 됐다. 그는 공립학교 교장 등으로 일하다 2001~2016년에 걸쳐 8선 의원을 했다. 출신에 구애되지 않은 혼다 전 의원의 활동에 김씨는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가주한·미포럼을 설립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일본은 위안부 문제를 한국과 일본의 이슈로 만들려 한다. 하지만 이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여성인권 문제다. 피해 여성이 50만명으로 추정되고 이들의 국적은 26개국에 달한다. 이런 문제를 한국이란 나라를 내세워 접근할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도 미국에는 일본도 우방이고 한국도 우방이다. 미국에는 위안부 문제에 원죄가 있다. 전쟁 직후부터 미·일 안보동맹을 맺어 아시아 방위에 일본을 이용하면서 전쟁범죄에는 눈감아왔다. 나는 미국 시민으로서 우리 정치를 바로잡는 것이다.”

올해로 서울 생활 19년째에 접어든 중국 국적 김월성씨가 지난 21일 서울지하철 대림역 중국음식점 거리에 섰다. 그는 “나는 중국 국적의 한국 사람”이라고 자신을 설명했다. 이준헌 기자

올해로 서울 생활 19년째에 접어든 중국 국적 김월성씨가 지난 21일 서울지하철 대림역 중국음식점 거리에 섰다. 그는 “나는 중국 국적의 한국 사람”이라고 자신을 설명했다. 이준헌 기자

■중국 출신 조선족 김월성씨 “세금 꼬박꼬박 냈는데 선거권은 안 주나요”

오랫동안 식당에서 일하다 지금은 가정집 청소를 돕는 김월성씨(54)는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출신 조선족이다. 서울 구로동에 집을 마련해 시어머니, 아들과 함께 살고 있으며 아들이 딸을 낳아 모두 4대가 한국에 있다. 불법체류로 시작한 그의 한국 생활은 올해로 19년째이지만 김씨와 가족은 모두 중국 국적이다.

그는 “나도 자식도 한국이 아닌 곳에서는 살기 힘들지만 중국 국적을 포기할 수도 없는 사연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중국 국민이지만 한국 사람이라고 말했다.

서울 땅을 밟은 것은 38세 때이던 2001년이다. 한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다. 8만위안을 들여 3개월짜리 산업연수생 자격을 얻었다. 빚을 갚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식당 주방에서 적은 돈을 받으면서 일했다. 국민건강보험에 가입하지 못해 아파도 약만 먹었다. 나중에 세어보니 한 식당에서 3년8개월 동안 2주도 쉬지 않았다.

이후 방문취업비자(H-2)를 받았다. 3년마다 중국에 가야 했지만 고향에는 가까운 친척이 없어 여비가 저렴한 칭다오(靑島)에 다녀왔다.

“중국 국적을 포기하려면 경제적인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중국에서 이웃들과 황무지를 개간해 옥토를 만들었는데 우리 가족분은 소작을 줬다. 여기서 나오는 돈이 적지 않다. 중국 국적에서 이탈하면 이 권리가 없어지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팔지 못한다. 나보다는 올해로 두 살인 손녀가 문제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한국어밖에 못하지만 중국 국적이다. 하지만 미성년자 단독으로는 국적 변경이 어렵다는데 그렇다고 동포비자로 계속 살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사실 중국어를 잘하지는 못한다고 했다. 그가 태어나 자란 곳은 헤이룽장성에서도 중국 최동단인 자무쓰(佳木斯)시 한 농촌이다. 김씨는 조선족학교를 다녔는데 수업은 조선말로 했다. 중국어 과목이 따로 있었다. 마을에서도 조선말을 썼다. 중국에 살면서 한족과 특별히 부닥치거나 갈등을 겪지는 않았다. 모두가 같은 중국 국민이라 생각했다. 민족차별은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은 대도시에서나 있다고 들었다. 서울에서도 한족과 조선족을 구분하지 않고 지낸다.

“한국에서 오래 살아도 국적 때문에 받는 차별이 적지 않다. 휴대전화 개통도 애로가 많다. 특히 한국에 세금을 꼬박꼬박 내고 사는데도 선거권이 없는 점이 아쉽다. 한국 정치에 대해서도 적잖게 알게 됐고 지지하는 정당도 있지만 쓸모가 없다. 법이나 제도에 우리의 뜻은 반영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간다는 생각도 든다. 누군가 나를 대표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남의 나라에 왔으니 순종하며 살아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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