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부대, 강경 진압 주저한 지휘관 보직 박탈…“투입 1시간 만에 시민 149명 검거” 자랑까지

2018.10.11 06:00 입력 2018.10.11 10:20 수정

[5공 전사-3화] 공수부대, 강경 진압 주저한 지휘관 보직 박탈…“투입 1시간 만에 시민 149명 검거” 자랑까지

3개 여단 3280명 광주 투입
광주총괄이던 윤흥정 사령관
‘소극적’ 이유 소준열로 교체

“무기 회수·추이 관망 목적”
당시 협상 나선 시민들 악용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투입됐던 공수부대는 모두 3개 여단이나 됐다. 5월17일 밤 7공수여단이 가장 먼저 광주에 도착했고 19일 11공수가 추가됐다. 20일에는 3공수까지 광주에 투입됐다. 투입된 병력은 7공수 688명, 11공수 1200명, 3공수 1392명 등 총 3280명이다.

<제5공화국 전사>는 당시 상황에 대해 “전남도경은 전남의 군소도시로부터 630여명의 기동경찰을 추가 동원하였고 계엄사령부는 제11공수와 3공수여단 병력을 광주시에 추가 투입하였는데 5월18일 2600여명 규모의 데모 진압병력은 20일에는 5800여명으로 증가됐다”고 기록했다.

국군의 최정예 부대였던 공수부대는 광주에 투입된 직후부터 시민들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며 강경 진압으로 일관했다. 공수부대 지휘관들은 비교적 온건한 작전을 선호했던 일반 부대 지휘관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신군부는 강경 진압을 주저한 당시 전투병과교육사령부 윤흥정 사령관과 31사단 정웅 사단장을 비난하며 보직을 박탈하거나 박탈을 시도했던 것으로 <5공 전사>를 통해 확인됐다.

<5공 전사>에는 5월18일의 진압작전 기록이 나온다. 이날 광주에 투입된 7공수 2개 대대는 광주 중심가였던 충장로에 출동했다. <5공 전사>는 “공수부대 계엄군들의 데모 진압 방식은 경찰의 그것에 비하여 매우 강력한 것이었다. 그들은 시위학생들의 해산과 그들의 체포에 주력하였다. 계엄군들은 인상착의가 학생처럼 보이면 일단 시위혐의자로 간주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다. 반항하는 난동자들은 곤봉으로 맞았고 구경하던 부녀자들이 떠밀려 넘어지기도 했다”고 기록했다.

<5공 전사>에 따르면 이날 “계엄군의 조직적인 진압 작전”으로 오후 5시까지 경찰은 52명을 검거했지만 7공수는 출동 1시간 만에 149명을 검거했다고 자랑했다. 광주 투입 첫날부터 공수부대가 시민들을 상대로 과격 진압을 자행한 것이다.

강경 진압을 따지는 광주지역 기관장 등에 대해 공수부대 지휘관들은 ‘격분’하기도 했다. <5공 전사>에는 5월19일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에서 열린 ‘군·민·관 합동대책회의’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자리에서 주요 기관장들이 “사태 격화의 책임이 계엄군의 과격한 진압 방식에 있다”고 지적하자 계엄군 지휘관들은 격분했다.

이들이 분노한 이유에 대해 <5공 전사>는 “계엄군 지휘관들로서는 국가비상사태하에서 계엄포고령을 위반, 사회 혼란을 조장하는 데모를 감행하고 계엄군에 대하여 투석하는 학생들의 소행을 ‘민주주의적’인 것이라고 보고 계엄군의 강력한 데모 진압을 ‘비민주주의적’인 것이라고 간주하는 기관장들과 지방 유지들의 발언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기록했다.

전두환 등 신군부는 5·18 진압에 비교적 온건한 성향을 보인 일반 부대 지휘관들에 대해서는 ‘우유부단하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했다’며 맹비난했다. <5공 전사>는 “전교사 사령관으로 전남계엄분소장이었던 윤흥정 장군은 사태 발발 전에 이미 체신부 장관으로 내정되어 있어 자기가 사령관으로 있는 동안만 무사히 넘기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평했다. 또 31사단 정웅 사단장에 대해서는 “그 지역 출신으로서 주민들의 여론을 의식, 오히려 데모대를 비호하고 나섰다”고 적었다.

광주지역 계엄군을 총괄하고 있던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소신 없고 소극적 태도로 인하여 데모 진압에 애로를 느낀다는 현장 지휘관들의 여론”을 이유로 5월21일 육군종합행정학교 교장이었던 소준열로 교체됐다. 정웅 31사단장 교체도 시도됐지만 윤 사령관의 반대로 불발되기도 했다.

계엄군은 시민대표들과 협상을 벌이기도 했지만 이 역시 ‘기만전술’의 하나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계엄군이 광주 외곽으로 물러난 5월21일 이후 광주시민들은 시민수습위원회를 꾸리고 계엄군과 대화에 나서기도 했다. <5공 전사>는 당시 협상에 응한 이유에 대해 “전남계엄분소는 협상에는 별로 큰 기대를 걸지 않았지만 그들과의 협상은 계속하였다. 그것은 온건파 대표들이 주도하는 무기 회수 작업을 촉진시키는 한편 추이를 관망하여 이성을 찾도록 순화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했다. 신군부는 평화적인 수습을 바랐던 시민들의 간절한 마음마저도 ‘악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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