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각오하고 마이크 잡았는데, 시민군을 나약한 존재로 서술해 분통”

2018.10.11 06:00 입력 2018.10.11 10:20 수정

5공 전사 속 사람들 - 시민군 ‘마지막 방송’ 박영순씨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날 계엄군의 진압에 맞서 시민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방송을 했던 박영순씨가 지난 4일 시민군이 머물렀던 전남도청 1층을 찾아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날 계엄군의 진압에 맞서 시민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방송을 했던 박영순씨가 지난 4일 시민군이 머물렀던 전남도청 1층을 찾아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도청 골목골목에 총 겨누곤
호소에 답한 시민 없었다니
5·18 대동정신을 조롱한 것

아직 세상 우습게 아는 그들
응징하는 데 힘 모으고 싶어

“살아날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순간이었습니다. 목숨을 구걸하기나 한 것처럼 시민군을 나약한 존재로 서술한 것에 분통이 터집니다.”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 바로 전에 ‘마지막 방송’을 했던 박영순씨(59). 그는 당시 대학 2학년생으로 모교인 광주여고 등 2곳에서 가야금 강사를 하다 23~27일 시민군 방송반원으로 항쟁에 나섰다. 박씨는 <5공 전사>가 발굴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 스스로 반란군이요, 폭도임을 고백했으니 이젠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되는 것 아니냐”면서 “아직도 세상을 우습게 아는 그들을 응징하는 데 힘을 모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5공 전사> 4편에서 ‘이날 새벽 첫 총성이 울리자 도청에 있던 여자 폭도는 스피커 방송을 통해 울먹인 목소리로 시민들이 나와 자기네를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집 밖으로 나온 시민은 아무도 없었다’는 대목에 등장한다.

바로 그날 그 방송실이 있던 옛 전남도청 1층을 찾은 박씨는 “<5공 전사>가 아무리 정치군인들이 쓴 승자의 기록이긴 하지만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뒤섞어놓고 편의적으로 서술했다”면서 “ ‘마지막 방송’ 부문만 해도 사실 왜곡에다 온갖 상상력을 보태놓았다”고 말했다.

박씨는 “그 기록엔 ‘새벽 첫 총성이 울리자 방송을 했다’고 했지만, 그에 앞서 한 시간 이전인 새벽 2시30분쯤부터 3차례 이상 방송을 했다”면서 “마치 총소리에 겁먹은 시민군이 총소리가 나자 ‘살려달라’고 무릎을 꿇은 모습으로 그려놓은 것은 가증스럽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방송에서 ‘우리는 광주를 사수(死守)할 것입니다. 부디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라고 집단 유언까지 남긴 상황이었는데 (시민군을) 나약한 겁쟁이로 몰아갔다”고 했다.

그는 이어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집 밖으로 나온 시민들은 아무도 없었다’는 서술에 대해서도 “생명에 대한 무자비성과 ‘5·18 대동정신’에 대한 모독을 드러낸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당시 마지막 날 새벽엔 무장한 계엄군 7000여명이 총부리를 겨누고 인간사냥을 준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면서 “그런데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고 적은 것은 시민군한테는 동조자가 없는 소수자라는 굴레를 씌우고, 광주시민에겐 총칼이 뭘 그렇게 무섭냐는 조롱이 배어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박씨는 “그날 뒤탈을 우려해 손바닥 크기의 방송원고를 겨우겨우 삼킬 무렵, 정전과 동시에 계엄군이 방송실을 덮쳐 개머리판으로 왼쪽 뒷머리를 맞고 정신을 잃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박씨는 시민군과 함께 체포돼 고문 등 온갖 수모를 겪은 뒤 내란부화수행 혐의로 징역 1년을 받고 복역하다 그해 10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박씨는 아직도 남은 고문후유증을 치료하며 오월민주여성회 부회장으로 활동한다.

박씨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헌신적으로 참여했던 여성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현실을 바로잡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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