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도 ‘혐오범죄’ 있다

2019.05.17 06:00 입력 2019.05.17 23:03 수정

[강남역 살인사건 3주기-한국에도 혐오범죄 있다]①판결문으로 본 혐오범죄

<b>“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혐오범죄”</b>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 3주기를 하루 앞둔 16일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서 ‘믿는페미’ 등 18개 시민단체들이 여성혐오범죄 3주기 연합 예배를 열고 있다. 권도현 기자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혐오범죄”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 3주기를 하루 앞둔 16일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서 ‘믿는페미’ 등 18개 시민단체들이 여성혐오범죄 3주기 연합 예배를 열고 있다. 권도현 기자

3년 동안 일반 형사사건에서만 13건 ‘혐오·증오·편견’ 단어 등장

2016년 5월17일 서울지하철 2호선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 한 건물 화장실에서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김모씨가 안면이 없던 20대 여성을 범행 대상으로 골라 살해한 이 사건을 두고 ‘혐오범죄(증오범죄)’ 논쟁이 불거졌다. 혐오범죄란 인종·종교·국가·성적지향·출신지역·나이·성별 등에 따른 혐오와 증오·편견에서 발생한 범죄를 말한다.

당시 경찰과 법원은 이 사건을 혐오범죄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유럽이라면 모를까, 한국에 무슨 혐오범죄가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정말 한국에는 혐오범죄가 없을까.

경향신문은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 발생 이후 법원에서 나온 판결 중 ‘혐오’ ‘증오’ ‘편견’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형사판결을 조사해봤다. 성폭력과 명예훼손·모욕 혐의로 기소된 사건은 제외하고 살인·상해·폭행·업무방해 등 일반 형사사건만 추렸다. 13건이 나왔다. 강남역 살인사건 발생 이전 찾아보기 힘들었던 ‘혐오’라는 단어가 판결문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을 확인했다. 가장 보수적인 집단인 법원에서 ‘혐오’라는 말을 쓴 것이다.

이들 판결은 일상에서 ‘혐오’가 어떻게 범죄로 뿌리내리는지를 드러낸다. 판결에 나온 범죄엔 ‘혐오표현’이 동반된 경우가 많았다.

2017년 7월4일 경기 시흥시 한 공원에서 ㄱ씨가 벤치에서 쉬고 있던 중국동포 ㄴ씨 일행에게 갑자기 다가가 말했다.

“너희 조선족 새끼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ㄱ씨는 집에서 가지고 나온 95㎝ 길이의 골프채를 들고 ㄴ씨 앞에 섰다. ㄱ씨는 3번째 골프채를 휘두른 뒤에는 바닥을 내리쳤다. 시멘트 조각이 ㄴ씨 얼굴에 튀었다. ㄱ씨는 특수폭행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ㄱ씨는 1년 전에도 비슷한 일을 벌여 징역 4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중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 들어가 “짱깨 새끼. XX놈. 너는 내가 망하게 만든다. 망할 때까지 내가 찾아올 거다”라고 욕설을 하며 소란을 피웠다. 중국동포 폭행 건에선 실형을 면치 못했다. 징역 6월이 선고됐다. 김승주 수원지법 안산지원 판사는 판결문의 양형이유에 이렇게 적었다. “두 범행 모두 오로지 피해자의 국적을 이유로 저지른 이른바 ‘혐오범죄’로서 결코 용납되어서는 아니될 것임에도 ㄱ씨는 짧은 기간에 반복하여 이를 저질렀다. 위와 같은 피고인의 범죄전력을 고려하면 유리한 정상을 모두 고려하더라도 실형의 선고가 불가피하다.”

한국에도 혐오범죄가 있다. 대부분 범죄는 혐오범죄의 속성을 갖고 있지만 수사기관과 법원이 이를 파악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상당수다. 수사와 재판을 거쳐 유죄 판결까지 나오는 사건 자체가 적을 뿐이다. 일상과 현실 속 가해와 피해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폭발적 해악 우려” 판사들이 ‘혐오범죄’를 말하기 시작했다

한국에도 ‘혐오범죄’ 있다

사업주의 우월적 지위 이용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폭력
가중처벌 요인 판단하기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는
또 다른 범죄 부를 수 있어
실태 파악·대책 마련 필요

혐오범죄 통계도 없던 한국서
판결에 ‘혐오’란 단어 등장은
논의의 출발점으로서 의미

ㄷ씨 사건은 범행 동기가 더 뚜렷하다. ㄷ씨는 2017년 8월 오전 울산 동구의 한 식당에서 술을 마시던 중 중국인 노동자들이 국내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생각에 화가 나 범행을 저질렀다. ㄷ씨는 중국 국적이었던 식당 운영자에게 욕설을 하고 팔을 잡아당기며 바닥에 앉아 있는 등 1시간 동안 소란을 피웠다. 이종엽 울산지법 판사는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된 ㄷ씨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판결을 내리면서 “식당에 중국인들이 자주 온다는 근거 없는 혐오와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피해자들의 영업을 방해해 피해를 입힌 것으로써 범행의 동기와 경위에 비춰 죄질이 불량하다”고 했다.

■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 대한 범행

혐오범죄는 일방적이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갈등이나 원한같이 상호작용으로 벌어지는 게 아니다. 혐오 정서를 지닌 가해자가 인종·성별 등 특정 집단에 속했다는 이유로 피해자를 범행 대상으로 정한다. 판사들은 이 같은 혐오범죄가 일반 범죄보다 사회적으로 비난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가해자들에게 더 중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ㄹ씨는 2017년 3월 중국에 거주하는 자신의 동생이 중국인들로부터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했다. 그러다 부산 동구에서 불특정 중국인에게 복수할 목적으로 식칼을 손에 들고 돌아다녔다. 한 마트에 들어가 “중국인 손님 없냐”며 중국인 손님을 공격할 것처럼 위협한 ㄹ씨는 급기야 길을 가던 30대 여성을 향해 “중국 사람이냐”고 소리를 지르는 등 1시간 동안 소란을 피웠다. ㄹ씨는 특수협박·업무방해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송중호 부산지법 판사는 “이 사건 범행과 같은 불특정 다수의 외국인에 대한 증오범죄는 인종주의적 견해와 결합해 사회적으로, 국제적으로 폭발적인 해악과 불안을 줄 우려가 크다”고 했다. 지난해 8월 경기 수원시에서 외국인 남성의 얼굴을 때렸다가 상해 혐의로 기소된 ㅁ씨 사건에서도 김도요 수원지법 판사는 “ㅁ씨는 외국인에 대한 혐오에 기초해 피해자에게 상해를 입혀 더욱 비난 가능성이 크다”고 명시했다.

■ 혐오범죄의 주 타깃 여성·노동자

여성은 혐오범죄의 주된 대상이었다. ㅂ씨는 2017년 7월 강원 홍천군의 한 마트 앞에서 지나가는 20세 여성의 등을 자신의 오른쪽 팔꿈치로 때렸다. ㅂ씨에게서 이런 폭행을 당한 5명은 모두 여성이었다. ㅂ씨의 범죄사실에는 “평소 여성에 대한 혐오감을 표출하는 방법으로 길을 가는 젊은 여성들을 폭행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쓰여 있다. ㅂ씨는 정신지체 장애인이었지만 판사는 ‘여성 혐오’로 발생한 범죄라고 판단했다. 조재헌 춘천지법 판사는 “ㅂ씨가 여성 혐오에 기반해 불특정 다수의 젊은 피해여성들을 상대로 소위 ‘묻지마 폭행’을 한 것은 죄질이 매우 나쁘고 위험성도 매우 크다”며 징역 6월을 선고했다.

이 사건의 항소심 재판부인 춘천지법 형사항소1부(재판장 정회일 부장판사)도 “이 사건 범행은 여성에 대한 근거 없는 반감으로 불특정 다수의 여성들에게 공개된 장소에서 폭행을 가한 것으로 죄질이 좋지 않고, 이 같은 범죄는 여성 등 약자에 대한 더 큰 범죄로 비화할 위험이 있다”며 ㅂ씨의 항소를 기각했다.

혐오범죄는 대체로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경우를 일컫지만 외국인 노동자와 사업주처럼 평소 아는 사이에서 혐오를 기반으로 한 폭력이 발생하기도 한다. 충북에서 기업체를 운영하는 ㅅ씨는 스리랑카 출신의 20대 외국인 노동자를 때렸다가 재판을 받게 됐다. 법원은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증오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비난할 만한 범행 동기라고 판단해 형량을 가중했다. 정찬우 청주지법 충주지원 판사는 “ㅅ씨는 외국인 근로자인 피해자에 대한 증오 및 우월감에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며 “피해자는 외국인으로서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어려웠다”고 했다. ㅅ씨에게는 징역 6월의 실형이 내려졌다.

■ 통계조차 없는 한국

판결에 ‘혐오’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과 교수는 “지금까지 한국의 증오범죄는 단편적인 사례들뿐이었다”며 “판결문으로 실제 폭력 상황이 드러나고, 판사들이 양형에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김태은 조선대 법학과 초빙객원교수도 “혐오범죄라는 개념이 아직 정형화돼 있지는 않지만 판결문에 그러한 표현이 나왔다는 것을 보면 혐오범죄 논의의 출발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한국엔 혐오범죄에 대한 기본적인 통계조차 없다.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강남역 살인사건 발생 직후인 2016년 12월 증오범죄통계법안을 발의했지만 종교단체 반대 때문에 열흘 만에 철회했다. 법무부와 경찰 등 수사기관도 혐오범죄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

미국은 이미 1990년에 증오범죄통계법이 제정됐고 법무부 장관 책임하에 혐오범죄 데이터를 수집하고 공표한다.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하자는 취지가 담겨 있다. 경찰 수사 단계부터 접근하는 방식이 다르다. 혐오범죄인지 여부를 판단하려고 범행 동기를 세밀히 수사한다. 김중곤 계명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혐오범죄 사례를 찾아봐도 거의 없는 이유는 수사에서 범행 동기를 밝히지 않기 때문”이라며 “우연히 (혐오와 같은 범행 동기가) 들어 있으면 혐오범죄라고 알려지는 식”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혐오범죄의 피해자가 속한 집단 전체에 정신적인 트라우마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피해의 확장성이 크다”며 “통계라도 수집해 얼마나 많이, 어떤 유형으로 혐오범죄가 일어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사기관 및 법원에 혐오범죄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혐오범죄를 가중처벌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지존파, 박탈감이 부유층 혐오로…여성 11명 살해 유영철 ‘여혐’ 부각 안돼

한국 혐오범죄의 역사

한국에서 혐오범죄(증오범죄)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죄를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돼왔다. 1994년 지존파 사건이 대표적이다. 지존파 일원들은 가난이 싫다며 부유층 5명을 살해했다. 일원 6명에게 사형을 선고한 1심 재판부는 “이들의 범죄동기는 한탕주의와 부유층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라고 했다. 당시 언론은 이 사건을 극심한 빈부 격차 때문에 생긴 빈곤층의 박탈감이 살인으로 이어진 혐오범죄라고 분석했다.이 사건들은 범행 대상이 주류 집단이었다는 점에서 인종·종교·국가·성적지향 등에서 소수집단에 속하는 이들에 대한 범행을 지칭하는 미국·유럽의 혐오범죄 개념과는 달랐다.

2003~2004년 마사지사와 전화방 도우미 등 11명의 여성을 살해한 ‘유영철 사건’이 발생했다. 유영철이 노인 8명도 살해했다는 점에서 사회에 막연한 불만을 갖다가 자신보다 약한 대상을 찾아 범행을 저지른 ‘묻지마 범죄’라는 해석이 많았다. 특정 사회적 약자 집단에 대한 ‘혐오’를 토대로 한 범죄인지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진 않았다. 2006년 서울 서남부 연쇄살인사건, 2006~2008년 강호순 사건 때도 비슷했다. 피해자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점은 부각되지 않았다.

2016년 5월17일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나서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범죄가 이슈로 불거졌다. 여성들이 나서서 이 사건을 묻지마 범죄가 아닌 여성 혐오범죄로 적극 규정했다. 비로소 성소수자·장애인·외국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집단적 혐오에 기반한 범죄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대책을 찾는 차원으로 논의가 넓어졌다.

2019년 5월 현재 정책적 논의는 여전히 미흡하다. 혐오범죄 개념도 확고히 정립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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