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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털을 사랑하기로 했어요…겨털 기르는 여자는 다 페미니스트인가요?” |이슈파이 ‘털, 기묘한 이야기’②

2019.07.22 17:00 입력 2019.07.22 18:26 수정

여성단체 ‘불꽃페미액션’은 2016년부터 천하제일겨털대회를 열었다. 여성들은 행사에 참여해 “겨털이 무성무성”, “자라나라 겨털겨털” 등의 문구를 쓴 피켓을 들며 겨드랑이 털을 공개했다. 올해도 ‘천하제일겨털대회’가 열렸다. 단체는 올해 대회 전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썼다.

“많은 사춘기 소녀들은 겨드랑이 털이 자라날 때부터 제모를 시작합니다. 우리가 보는 ‘아름다운’ 여성들은 아무도 털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털이 없는 것처럼 여름엔 일상적으로 제모를 합니다. 면도기 사용이 익숙치 않아서 칼날에 살이 베이기도 합니다. 털을 뽑는다고 피부가 빨갛게 올라오기도 합니다. 몸을 상해가며 ‘여성의 미용’을 배워나갑니다. 이것은 여성의 몸에 대한 억압을 내면화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겨털을 사랑해 주세요. 겨털이 자라나도 좋다고 긍정해 주세요. 여성들이 제모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제모하지 않은 겨드랑이도 괜찮다는 걸 보여주세요. 여성의 겨털이 ‘더럽’거나 ‘흉측’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세요. 건강에 좋지 않은 제모 습관을 버리고 편하게 살아가자고 말해주세요.”

겨드랑이, 다리 털을 꼭 밀지 않아도 되는 사회, 털을 밀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은 사회, 그런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미국 가수 할시가 ‘롤링스톤’ 표지에 겨드랑이 털을 드러냈다. ‘롤링스톤’ 캡처

미국 가수 할시가 ‘롤링스톤’ 표지에 겨드랑이 털을 드러냈다. ‘롤링스톤’ 캡처

■제모 안하니 “너무 편해요”

나일롱(25·가명)은 2016년 스물두 살부터 페미니즘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제모를 하지 않기 시작했다. 4년 정도 됐다. “샤워하고 나서 제모하면 약간 아픈데 제모를 안하니 아픔이 사라졌고 샤워가 간소화돼서 편해요.” 포옥(가명)은 제모 안한 지 5년 정도 됐다. 여전히 짧은 반팔티를 입으면 팔을 들어올리기 힘들다. 반팔 입고 팔을 들면 어느 이상 들어올렸을 때 겨드랑이 털이 보이기 때문이다. “대신 옷을 긴 걸 사게 되죠. 그렇지만 페미니즘이 저를 자유롭게 해줬어요. 겨드랑이를 보여주지 않으니까 사람들도 잘 몰라요. 누가 귓속 털에 신경을 써요. 그런 거랑 같아요.”

퀴어인 나일롱은 주변 친구들도 퀴어가 많은데 여성들끼리는 서로의 몸을 보더라도 털에 대해서 자유롭다. “저는 약간 온실 속에 있는 느낌이예요. 제모를 안 해도 크게 어려움이 없어요.” 제모를 안 하니까 “좀더 내 몸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느낌”이 든다. “털도 제 몸의 일부인데 잘라내지 않아도 되니까 내 몸을 사랑하고 지켜준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아요.” 포옥은 불꽃페미액션의 ‘천하제일겨털대회’에도 출전해 봤다. “자유로웠어요. 그날 하루만큼은 과해도 되고 화려해도 되고 남들과 같다고 숨기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어요. 그때 한번 소매를 다 접어서 민소매처럼 말아올린 뒤에 비상하듯이 팔을 들었어요.”

■왜 한국에서 ‘겨털 연예인’은 안 나오는가

최근 미국 가수 할시가 음악 잡지 ‘롤링스톤’ 표지에서 겨드랑이 털을 드러내서 화제가 됐다. 화보가 공개된 이후 가수 데미 로바토는 “너무 좋아서 어디서부터 칭찬해야 할지 모르겠다”라는 댓글을 남겼고 가수 자라 라슨은 “대부분의 잡지와 달리 겨드랑이털을 포토샵으로 수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정말 마음에 든다. 여성들은 몸에 털이 없는 아기가 아니다”라고 썼다.

미국 드라마 <브로드시티> 여주인공 일라나도 겨드랑이 털을 보여준다. 나일롱은 “외국 미디어에 비친 여성의 몸의 형태가 더 다양하다”고 말했다. “좀더 체중이 나가거나 좀더 사이즈가 큰 여성도 많이 나오고요. 좀더 다양한 모습의 여성들이 많이 대표되지 않나 (생각해요). 반면 한국은 획일화되어 있어요. 여자 연예인들에 대해서는 ‘쉬고 나왔더니 쟤 왜 이렇게 살 쪘어’ 기사 올라오죠. 남자 아이돌은 ‘찌면 귀엽네’라는 댓글이 달려요. 여성에 대해서는 말라야 한다는 기준이 있는 거죠.” 실제 남성 모델이 화보를 찍으면 겨드랑이 털을 제모하는 게 아니라 포토샵으로 없애기도 한다. 몇년 전 남성 아이돌은 겨드랑이 털을 제모했다가 “겨드랑이에 불 붙은 게 아니냐”며 큰 이슈가 됐다.

마일리 사이러스가 겨드랑이 털에 염색한 모습.

마일리 사이러스가 겨드랑이 털에 염색한 모습.

2015년 마일리 사이러스는 겨드랑이 털에 핑크색 염색을 해서 화제가 됐다. 겨드랑이 털을 염색하거나 파마하면 안 되는 걸까. 겨드랑이 털 염색 포스트에는 ‘더럽다’는 댓글 일색이었다. “매일같이 제모해야 한다고 주입받는 게 남성의 수염하고 여성의 겨털이 있잖아요. 수염은 하나의 패션으로 관리를 해줘야 하는 것이라면 겨털은 무조건 없어야 하죠. 파마를 한다든지 염색을 한다든지 숱 치기를 한다 하면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거잖아요.”(포옥) 남자가 수염을 기르면 성숙함의 상징일 수 있지만 여자가 겨드랑이 털을 기르면 ‘저항이 상징’이 된다. “페미니스트할 거면 겨털을 길러야 하고 숏컷해야 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숏컷하고 겨털 기르는 여자는 다 페미니스트인가요?”(포옥)

■제모가 ‘선택’이 되는 사회

남성의 면도와 여성의 제모는 다를까. “저랑 같이 일하는 상사는 수염을 삐죽삐죽 하고 와서 왜 안 하셨냐고 물으니 ‘면도하면 살이 깎여서 이틀에 한 번 주기로 한다’고 해요. 남성이 면도를 안 하고 출근하면 오늘 아침에 굉장히 바빴겠구나, 늦게 일어났나보다 이해를 해줘요. 그런데 여성은 겨드랑이에 샤프심 같이 삐져나오면 ‘미처 제모할 시간이 없었나보다, 피부가 여린가보다’ 생각해주지 않는 듯해요. 남성은 선택이지만 여성은 해야하는 일처럼 느껴져요.”(포옥)

남성 면도 이미지 모음.

남성 면도 이미지 모음.

나일롱은 “제모는 선택”이라고 말했다. “제모를 하지 말자는 게 아녜요. 자신이 선택한 게 아닌데 했을 때 짐이 되잖아요.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는게 자연스러웠으면 좋겠어요.” 진희씨는 “제모를 하든 안 하든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니까 ‘다 괜찮다’고 하고 싶다”고 말했다. “‘제모를 하면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닌 걸까’ 의문은 안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하든 다 온전한 자신이잖아요.” 포옥도 “제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100명의 페미니스트가 있다면 100가지 페미니즘이 있는 사회예요. 다만 제모를 하고 싶지 않은데 제모를 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제모 안 해도 돼’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면 좋겠어요.”

‘머리카락하고 눈썹 말고는 털이 하나도 없어야 하고 팔뚝살은 없어야 하고 허벅지는 무조건 떨어져 있어야 하고 허벅지와 엉덩이 살이 분리되어 있어야 하고 다리가 길면 길수록 좋고 힐을 신어야 되고 머리카락은 짧으면 안 되고 피어싱은 없어야 하고 문신하지 말아야 하고 말투는 상대방 기분에 맞춰줘야 하고 다리를 벌리면 안 되고…’ 포옥은 “사회가 여성에게 꼭 딱 앉아있는 관절인형 같은 느낌을 원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진희씨는 “여자의 몸은 고기가 아니다. 등급을 매기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나일롱도 “다양한 여성성이 있고 좀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고 또 수용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자신을 ‘소영’이라고 소개한 독자가 글을 보내왔다. 전문을 소개한다.


중학생이 되었다. 2차성징의 시작으로 몸 곳곳에 털이 자라기 시작했다. 특히 겨드랑이와 다리털에 대하여 고민이 많았다. 매일 보는 티비에서도, 언니와 엄마 그리고 주위의 모든 어른들은 털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털들을 보며 의문을 품었다. 왜 나만 이렇게 털이 많은거지? 내가 남성 호르몬이 많은건가?

그렇게 나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제모를 시작했다. 처음은 아빠의 일회용 면도날을 사용했다. 뭘 잘못한 건지, 이리저리 베여 피를 보기도 했으며 광고에 나오는 약품을 사용한 면도를 시도했다가 알레르기로 피부과에 가길 몇 번. 고등학생 때 나는 꼭 레이저 제모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눈썹과 머리카락을 제외하고는 다 없애고 싶었다. 그렇게 몇 년을, 이틀에 한 번씩 털을 밀어버렸다. 그게 얼마나 수고스럽고 쓸데없는 시간들이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말도 못한다.

나는 그렇게 매끈한 겨드랑이와 다리를 자랑하는 세상에서 내 몸의 털들을 부정한 존재로 여기며 살아왔다. 대학생이 된 나는 겨드랑이 레이저 제모를 받았다. 5회에 15만원이었다. 양쪽 다리마저레이저를 하기엔 비용이 너무 부담이 되어 하지 못했다. 6주마다 한 번씩 그 고통을 참고나니 나를 반긴 건 다름 아닌 겨드랑이 털 몇 가닥. 샤프심이라 불리는 그 털이었다.

허무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나의 털을 부정하지 않는다. 여성단체에서 털에 해방을 줬다. 너도나도 겨드랑이 털을 자신있게 내보인다. 나는 인형이 아니다. 털이 날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나는 내 털들을, 이 몸을 사랑하기로 했다. 잘못된 건 세상이다. 털 없는 여성들만 보여주는 미디어의 잘못이다. 여성에게 털은 자연스러운 거라고 가르쳐주지 않는 사람들의 잘못이다. 털과의 영원한 전쟁 종료를 선포한다. 나는 나의 털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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