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장애” 입에 달고 사는 당신도 차별주의자입니다

2019.10.26 06:00
장은교 기자

우리 사회의 ‘선량한 차별’

김지혜 교수는 “우리가 생애에 걸쳐 애쓰고 연마해야 할 것은 ‘차별받지 않기 위한 노력’에서 ‘차별하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김지혜 교수는 “우리가 생애에 걸쳐 애쓰고 연마해야 할 것은 ‘차별받지 않기 위한 노력’에서 ‘차별하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당신은 차별주의자인가요. 아니. 그럴 리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주민에게 “너네 나라로 돌아가!”, 일자리를 갖지 못하는 장애인에게 “능력이 달리니까 어쩔 수 없지”, 성소수자에게 “변태”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심각한 차별이며 명백한 혐오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고요.

이 말들은 어떤가요. “결정장애” “안 본 눈 삽니다” “결혼은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관계를 맺는 것” “다문화! 방과 후에 남아”. ‘응? 뭐가 문제지’ 싶다면 장애인과 성소수자, 이주민 가정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죠. ‘결정장애’라는 말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오래 고민하는 것을 ‘위트 있게’ 표현하는 말로 많이 쓰입니다. 여기서 ‘장애’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입니다. 장애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부족하고 열등한 뜻으로, 그것도 재밌는 농담처럼 쓰이는 현실이 장애인의 입장에서는 어떤 마음이 들까요. “안 본 눈 삽니다”는 대중가요 제목으로 쓰이기도 했죠. 보기 싫은 것, 민망한 것을 봤다는 것을 재치 있게 표현한 말로 쓰입니다. 그런데 시각장애인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면 어떤가요.

표준국어대사전은 결혼의 의미를 이성 간의 결합으로 정의합니다. 네, 적어도 대한민국에선 법적으로 결혼은 이성 간의 결합으로 제한되고 있는 것이 맞습니다. 법률용어가 아닌 ‘국어’의 말 풀이에서조차 결혼을 이성애자들만 가능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차별일까요, 아닐까요.

‘다문화’라는 말은 원래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뜻하는 ‘좋은 말’이지만, 이주민 가정의 자녀를 가리켜 ‘다문화’라고 부르는 건 어떻게 들릴까요.

마지막 질문을 드릴게요. 그 어렵다는 회식 메뉴 정하기를 해보겠습니다. 다섯 가지 정도의 메뉴를 단체채팅방에 올려놓고 20명의 구성원들이 투표를 통해 결정했다면 이 과정은 민주적일까요. 혹시 구성원 중에 채식주의자가 있고, 보기 중에 채식주의자를 위한 메뉴가 없었다면 어떤가요. 투표를 걸쳐 채식주의자는 먹을 수 없는 메뉴를 결정했다면, 이 의사결정과정은 차별일까요, 아닐까요.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쓴 김지혜 교수(다문화학)는 “나는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착각이고 신화일 뿐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사람은 수많은 다중적 지위의 복합체이기 때문에 차별을 받기도 하지만, 차별을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당신은 차별주의자인가요. 혹시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아닌가요. 12년 동안 국회에서 외면당하고 있는 차별금지법 제정은 일부의 소수자들만을 위한 법일까요. 출간 석 달 만에 15쇄를 찍으며 ‘차별’을 화두로 끌어올린 김 교수를 만나 우리 사회의 선량한 차별에 대해 들어봤습니다.

◆몰랐다, 내가 무심코 건넨 말 속에 ‘차별’이 숨어있었다는 걸

[커버스토리]“결정장애” 입에 달고 사는 당신도 차별주의자입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저자 김지혜 교수가 말하는 일상의 차별

김지혜 교수(다문화학)는 <선량한 차별주의자> 9쇄부터 책날개에 실린 저자소개를 수정했다. 출신학교 정보를 빼고, 어떤 주제를 공부하고 어디서 일했는지만 간략하게 썼다. 차별을 얘기하면서 학력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부자연스러워 보인다는 한 독자의 반응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13쇄부터는 수화동아리에서 활동했다는 내용도 수정했다. 수화를 ‘수어(手語)’로 고쳤다. 언어라는 의미를 더욱 강조한 말뜻이다. 쇄를 거듭하며 초판의 오류를 잡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이 책의 진화 과정은 조금 다르다. 조금이라도 차별의 언어를 쓰지 말자는 것이 개정기준이다. 김 교수는 “계속 고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훗날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할 내용이 포함돼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직 차별을 부정할 때가 아니라 더 발견할 때”라고 하는 김 교수를 지난 16일 만났다.(차별에 관한 이야기니만큼 나이를 밝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김 교수의 뜻에 따라 정확한 나이는 표기하지 않습니다. 김 교수는 1970년대생입니다.)

|1등과 꼴찌는 보상 달라야, 가난한 나라, 능력 없잖아, 육아 도와줄게, 다수결로 정할까, 동성애는 좋아하지 않아, 여자는 이래야, 노키즈존, 결정장애…

- ‘결정장애’라는 말이 차별을 연구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요.

“3년 전 혐오표현에 관한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했어요. 제가 ‘우리가 이렇게 문제가 있다고만 얘기하지 말고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하지 않을까요’라는 의미에서 ‘결정장애’라는 말을 썼는데, 토론이 끝나고 한 참석자분이 ‘왜 결정장애라는 말을 썼어요?’라고 물었어요. 순간 제가 그 말을 재밌다고 쓴 것도 놀랐지만, 마음 한편으론 ‘아니 뭐 이런 것까지… 내가 그럴(비하할) 의도는 아니었어’라는 마음이 드는 게 더 놀라웠어요. 흔히 정치인들이 잘못된 말을 하고 쓰는 레퍼토리를 제가 그대로 하고 있더라고요. 저는 인권을 공부하는 사람이고 하루에도 몇 시간씩 강의를 하는 사람인데,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다니는 걸까 무서웠어요.”

-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개념은 어떻게 생각하게 됐나요.

“각종 소수자 문제 관련 댓글들을 보면 ‘선량한 시민을 왜 차별주의자로 모느냐’는 내용이 많았어요. 특히 지난해 예멘 난민을 받아들이는 게 문제가 됐을 때 그랬죠. 그만큼 ‘차별’이라는 말이 굉장히 무거운 거예요. ‘차별주의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절대 누군가를 해하는 그런 나쁜 사람이 아니다’라는 마음을 갖고 있는 거죠. 참 묘했어요. 도대체 사람들은 차별이라는 말을 어떻게 쓰고 있는 것일까. 차별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굉장히 긍정적인데, 그걸 잘 활용하면 정말 차별을 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고민으로 연결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 교수는 책에서 “서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진다. 우리는 한곳에만 서 있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다중적 지위의 복합체’로서 누구나 차별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김 교수는 예멘 난민 수용에 관한 의견을 묻는 여론조사에서 남성보다 여성의 반대가 높게 나타난 결과(남성 46.6%·여성 60.1% 반대)에 주목했다(2018년 리얼미터·tbs 여론조사 결과, 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500명 대상,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4.4%포인트). 당시 반대했던 여성들은 성범죄 가능성 등 ‘안전’을 우려했다. 예멘 사람을 ‘난민’보다는 범죄 가능성이 있는 남성으로 인식한 것이었다. 난민인정제도를 폐지하자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물에 71만4875명이 동의서명을 했다. 당시 최고기록이었다. 2018년 6월1일부터 예멘인은 더 이상 제주도에 무비자 입국을 할 수 없게 됐다. 평범한 시민들은 보통 시외버스에 탑승하는 것을 특권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휠체어를 탄 장애인의 입장에 서면 시외버스를 탈 수 있는 것도 권리가 되고 장애인들이 이용할 수 없는 구조는 ‘차별’이 된다.

- ‘소수자도 소수자를 차별한다’는 문제제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가장 차별받는 소수자그룹은 누구라고 생각하나요.

“순위를 정해 얘기하긴 어려운 것 같아요. 소수성이 중첩될수록 차별의 문제를 해결하기가 더 어렵다는 생각은 들어요. 성별, 나이, 장애,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학력, 지역, 국적, 경제적 수준 등등. 세상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긴 하지만, 그 변화가 하나씩 이뤄지니까요. 여러 가지 소수성을 복합적으로 갖고 있다고 할 때, 그중 어느 하나만 해결된다고 문제가 풀리진 않잖아요. 예를 들어 장애여성은 장애인이면서 여성인데, 각각의 차별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거든요.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어도 장애여성의 삶은 별로 바뀌지 않을 수도 있는 거겠죠. 교차하는 차별들을 함께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성별·나이·장애·성적지향·학력·국적 등 ‘차별은 나쁘다’ 생각하지만 일상선 대부분 모르는 채 말하고 저질러…능력·경제력 ‘차별해도 된다’ 주장과 싸우는 한국, 왜 단호하게 ‘안된다’ 말 못할까

- 요즘은 ‘인종차별’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이죠.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하는 용역프로젝트인데, 연구는 끝났고 올해 안에 보고서를 마무리할 거예요. 사람들은 인종차별이라고 하면 피부색에 따른 차별이라고 생각하고, ‘한국엔 그런 거 없어’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하지만 어느 나라 출신이냐에 따라 차별을 하고, 동포라고 해도 마찬가지로 구분해요. 사실 사람을 인종으로 나눈다는 것 자체가 허구의 개념인데요. 사람들은 실제로 차별할 만한 어떤 이유가 있다고들 생각해요. ‘너는 가난한 나라에서 왔잖아’ ‘너는 능력이 없잖아’ 등등. 그런데 본래 인종주의란 것이 어떤 집단에 대해 ‘성품이 이래’ ‘능력이 어때’ 이런 식으로 그 사회의 가치체계에서 뭔가 안 좋게 여겨지는 것들을 부착해가는 방식인 거죠. 여성차별도 ‘여자는 어떻다’라는 편견에서 출발하잖아요. 특히 최근 한국 사회에서의 인종차별은 경제적 수준에 따른 차별과 중첩되는 면이 많아요.”

[커버스토리]“결정장애” 입에 달고 사는 당신도 차별주의자입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을 한다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에 뿌리를 둔다. 일상의 많은 차별이 ‘모르고’ 저질러진다. 2016년 출간돼 100만부가 팔리며 페미니즘 담론을 끌어올린 소설 <82년생 김지영>에서 남편 정대현은 아이를 낳을까 말까 고민하는 김지영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많이 도와줄게. 기저귀도 갈고, 분유도 먹이고, 내복도 삶고 그럴게.” ‘육아는 기본적으로 부인의 일이지만 도와주겠다’는 호의를 비치는 것 역시 ‘선량한 차별’이다. 동명 영화에서 남편 역을 맡은 배우 공유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극중 남편의 발언에 대해 “대현은 분명히 좋은 사람이고 이상적인 사람일 수 있지만 그런 대현조차 어떤 차별이나 문제점을 모르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고 말했다.

- 본인이 차별을 하고 있다는 인식조차 못하고 차별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아 보이네요.

“음…저는 요즘 우리가 의사결정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요.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게 다수결이잖아요. 예를 들면 다 같이 식사를 하는데 채식주의자가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메뉴를 죽 올려놓고 다수결로 정하게 되면, 채식주의자는 배제되는 결과가 나오기 쉽죠. 이 결정 과정은 굉장히 민주적으로 보여요. 국가의 의사결정 과정도 비슷해 보여요. 예산과 정책을 죽 놓고 다수결을 원칙으로 결정하게 되면 여러 소수자들의 문제는 버려지는 거죠. 지금 이야기하는 평등은 모두를 고려한 선택을 해보자는 거예요. ‘노키즈존’의 경우도 아동을 배제하는 식의 문제 해결이 아니라, 아동도 손님이고 사람으로 생각할 때 모두가 만족하려면 그 공간을 어떻게 구성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자는 거죠. 창의성이 요구되는 거죠. 저는 이 시대에는 의사결정 과정을 새로 배워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김 교수는 “공공의 공간에서 거절당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소수자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성질 가운데 하나”라고 썼다. 일부 사례를 이유로 주장하는 ‘노키즈존’ ‘노장애인존’의 문제를 언급하며, “진상손님이 남성이었다면 ‘성인남성 금지’라는 표지판을 내세울까?” “진상손님이 인근의 대기업 직원이라면 ‘○○기업 금지’라며 모든 사원의 입장을 거부할까?”라고 묻는다.

|불평등이 축적된 사회 구조 속에서 개인이 ‘그냥 평등해야만 해’라는 관념 가지고는 ‘차별’ 해결 안돼, 국가가 시간과 노력 투자하고 법 만들어 ‘분리 아닌 함께’ 살아가길 힘써야 해

- 능력과 노력에 따른 차별은 당연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이 사회는 경쟁사회고 그 안에서 열심히 노력해 1등 한 사람과 꼴등 한 사람 사이에 차별을 두는 것은 공정한 것이라는 믿음이죠. 뭔가 공정성과 평등이 대립되는 것처럼 이야기해요. 장애인, 이주민, 여성에 대한 차별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능력과 쓸모에 따라 차별을 정당화해요. 그런데 정말 능력주의는 공정한 규칙일까요? 노력과 기여에 정당한 보상을 하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노력을 할 여건조차도 불평등하죠. 게다가 지금 한국 사회의 능력주의는 누군가를 차별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능력을 이유로 어떤 사람을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고, 공간을 분리하고, 책임은 부여하면서 권리를 줄이는 거죠. 그건 결국 신분제를 만드는 거거든요. 사람들이 모두 동등한 권리가 아니라 서로 다른 권리를 가지고 사는 사회가 신분사회인 거죠.”

- 그래도 노력하면 된다는 능력주의 신화는 쉽게 깨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불평등한 사회가 더 고단하게 느껴지는 건,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에요. 여자라서 이주민이라서 장애인이라서 성소수자라서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하라는 요구를 받고, 개인의 노력으로 그 불리함을 극복한 성공신화를 칭송해요. 세계관의 충돌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계급이 나눠져 있고 사다리가 희미하게라도 있고 그 위에 있는 사람은 어떤 것을 누려도 마땅하다는 세계요. 그런 시스템은 노력만 하면 나도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죠. 누군가는 평등한 사회보다 이런 식의 질서를 더 좋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사실은 평등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구나. 그럼 그건 어떻게 봐야 할까 고민이에요.”

◆알았다, 선량한 마음만으로는 ‘평등’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8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주한외교관 초청 리셉션에서 필립 터너 뉴질랜드 대사(왼쪽에서 두번째) 부부와 인사하고 있다. 청와대는 동성커플인 터너 부부를 ‘배우자 지위’로 인정하고 초청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8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주한외교관 초청 리셉션에서 필립 터너 뉴질랜드 대사(왼쪽에서 두번째) 부부와 인사하고 있다. 청와대는 동성커플인 터너 부부를 ‘배우자 지위’로 인정하고 초청했다. 연합뉴스

- 조국 전 법무부 장관 파문은 어떻게 봤나요.

“조심스러운 이야기예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몇 가지 의문이 들긴 했어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딸의 입시 과정을) 알았을까. 그것을 특권이라고 생각했을까. 조 전 장관이 만나는 그룹은 어떤 그룹이었을까. 어떤 생각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그 그룹 안에서는 자연스러운 규범이라서 그런 거죠. 전체적으로 보면 굉장히 불평등한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점점 더 인식을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2007년 발의된 차별금지법은 12년째 상정도 못 되는 상황입니다. 헌법에서 차별을 금지하는데 굳이 차별금지법까지 만들어야 하냐는 의견도 있어요.

“누구나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만으로 여성이 국회의원이 되지 않잖아요. 헌법에 교육받을 권리가 명시돼 있다고 해도 교육시스템을 만들지 않으면 교육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요. 예를 들어 가사노동을 남성도 같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도 그게 갑자기 되는 게 아니잖아요. 여성들은 어릴 때부터 가사노동을 보고 경험하는데, 그러지 못한 남성들이 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죠. 그럼 효율성 면에서 떨어지니까 그냥 여성이 해버린다든지, 고용을 하더라도 여성을 돌봄노동에 고용하게 되잖아요. 불평등한 것이 축적된 상태에선 ‘그냥 평등해져야만 해’라는 관념으로는 해결되지 않아요. 차별금지법은 국가가 이것에 대해 책임지고 고민하는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차별 해결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정책을 갖고 집행해야 하는 문제니까요. 우리가 살아온 습관이나 익숙해진 것들이 있어서, 어떻게 해야 차별을 하는 것인지 아닌지 모르는 경우도 많잖아요.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안되는 거죠.”

-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거군요.

“폭력도 하나의 해결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시절이 있었잖아요. 하지만 ‘폭력을 사용해선 안돼’라는 원칙을 만들면 폭력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단호하게 얘기할 수 있거든요. ‘차별금지’는 인류가 구축해놓은 너무나 기본적인 원칙인데, 2019년 한국 사회에서 ‘차별을 해도 된다’는 주장과 싸우고 있으니… 이 원칙까지 공격받고 있는데도 단호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혹시 지금의 정치인들이 이 시대 사람들이 겪는 불평등과 동떨어져 있는 건 아닐까요.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볼 수 있는 경험과 인식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정치인의 다양성도 무척 중요하죠. 국회가 모두를 대변해야지 일부만 대변해선 안되니까요.”

- 출간 석 달 만에 15쇄를 찍었습니다.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운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잘은 모르겠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말 많은 차별과 싸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의 권리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싶지만, 다른 소수자들이 받는 차별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어 해요. 제가 결정장애에 대한 이야기를 쓰니까, 어떤 분들은 ‘장애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고 묻기도 해요. 이걸 저에게 물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참 슬퍼요. 어릴 적부터 분리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만나고 싸우고 함께 살면 되는 거죠. 대중교통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 다양한 존재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잖아요.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소수자의 권리 측면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어울려 살 것인가의 문제예요. 모두가 있는 그대로 어울리며 사는 세상을 얘기하고 싶은 거예요.”

◆‘동성애 옹호법’ 혐오 프레임에 갇힌 12년 시민 연대 강화…정치권은 보수 ‘눈치’만

[커버스토리]“결정장애” 입에 달고 사는 당신도 차별주의자입니다


차별금지법 ‘험난한 역사’

 “차별금지법안은 2013년 4월24일 철회되었습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차별금지법안’을 검색하면 이런 안내글을 볼 수 있다. 새정치국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소속 김한길 의원 등 51명이 19대 국회였던 2013년 2월 발의한 이 법안은 발의를 주도한 의원들이 자진철회를 선언하면서 국회에서 사라졌다. 대한민국 국회의 차별금지법 제정사는 2013년 4월에 멈춰 있다.

■ 누더기 법안, 자진철회…차별금지법 제정 12년사

 차별금지법은 모든 생활 영역에서 개인의 특성을 이유로 차별을 금지하자는 법안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인간의 태생적, 후천적 특성을 이유로 차별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제도적 장치가 마련됐다. 유럽연합은 차별금지법 제정 여부를 가입조건으로 두고 있다.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도 인권법 같은 통합법 또는 개별법의 형태로 차별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금지, 처벌하는 조항을 갖고 있다.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의 경우도 차별이나 혐오 표현, 행동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법으로 규제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길에서 누군가 “나는 흑인이 싫어!”라고 소리친 것을 처벌하진 않지만, 회사 등 집단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흑인 직원에게 “나는 흑인이 싫어!”라고 말하면 차별행위로 규제된다.

 한국의 차별금지법 제정 논의는 10년 넘게 ‘차별금지법 = 동성애 조장·옹호법’이라는 혐오프레임에 갇혀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처음 시도된 것은 2006년 참여정부에서였다. 당시 국가인권위원회가 권고했고, 2007년 법무부가 17대 국회에 차별금지법을 발의했지만 보수 기독교단체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법무부는 원안에서 가족형태 및 가족사항, 병력, 범죄 및 보호처분의 전력, 성적지향, 언어, 출신국가, 학력 등 7개 차별금지 사유를 삭제해 다시 발의했지만, 이마저도 상정되지 못하고 폐기됐다. 이후 18대 국회에서 두 번, 19대 국회에서 세 번 발의됐지만 모두 폐기되거나 철회됐다.

 특히 2013년 2월 발의된 두 개의 차별금지법안(김한길 의원 등 51명, 최원식 의원 등 12명)은 시한이 만료되기 전에 발의한 의원들이 직접 “철회”했다. 재·보궐선거를 1주일여 앞둔 시점이었다. 이 사건은 국회에서 국민의 대표들이 민주적 절차에 따라 진행한 차별금지법 제정 과정이 보수 기독교단체들의 빗발친 항의에 굴복한 굴욕적인 역사로 기록됐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과 여당의 입장은 계속 후퇴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2012년 대선 때 차별금지법 제정을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2017년 대선 때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며 한발 물러났고, 공약집에도 담지 않았다. 대선기간 중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소속 목사들을 만난 자리에서는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다른 성적지향을 이유로 차별돼서는 안된다고 규정돼 있기 때문에 추가적인 입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대선 토론회 때 ‘동성애를 반대하느냐’는 질문에 “그럼요” “동성애를 좋아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가 사과하는 등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당선 초기 만든 국정과제에도 차별금지법 제정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후 20대 국회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은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2018년 10월 기준 118개 시민단체 연합)가 지난달 17일 민주당, 24일 민주평화당에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질의와 의견표명을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했지만, 양당 모두 공식적인 입장은 내놓지 않고 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오는 31일 자유한국당도 방문할 계획이다. 질의서를 받은 정당 중에는 유일하게 정의당만 “20대 국회에서도 발의하고, 21대 국회에서는 반드시 제정되도록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21대 총선을 5개월여 앞둔 상황에서 정당들이 차별금지법 제정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관측하는 사람은 없다.

■ 국회는 외면해도, 시민들은 나아간다

 국회는 12년째 머뭇거리고 있지만,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시민들의 연대와 의식은 확장되고 있다. KBS가 올해 초 실시한 신년여론조사(2019년 1월18~19일, 전국 성인 남녀 1000명 대상,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서 ±3.1%포인트)를 보면 응답자 중 64%가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현장활동가와 전문가들은 정치가 시민의식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지난 10여년간 성적지향성과 성적정체성을 포함, 소수자 차별에 대한 시민의식은 넓고 깊어졌지만, 정치인들만 ‘사회적 합의’를 핑계로 논의조차 미루고 있다는 것이다. 유엔 경제·사회·문화적권리위원회는 이미 2009년 대한민국 정부에 성별, 인종, 연령, 성적지향, 성적정체성, 학력, 종교 등이 포함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했고, 2015년과 2017년에도 재차 법 제정을 권고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 미류 활동가는 “사회적 논란이 있어 논의하기 이르다고 얘기하는 것과 사회적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얘기하는 것은 다르다”며 “집권여당이 가진 힘을 사회적 논의를 봉쇄하기 위한 방향으로 쓸 것이냐, 아니면 사회적 논의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쓸 것이냐의 문제”라고 말했다. 미류 활동가는 “현장에서 만난 시민들은 오히려 ‘이런 당연한 법을 왜 못 만들지?’라며 의아해하는 의견을 많이 보인다”며 “차별 문제는 대등한 관계에서 발동하는 갈등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권력을 갖게 되는 다수자 집단에서 소집단에 가해지는 폭력이라는 점에서 한 집단이 스스로 폭력을 포기하기를 기다려선 안된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지난 18일 뉴질랜드 대사의 동성파트너를 ‘배우자 지위’로 인정해 주한 외교관 리셉션에 초대했다. 문 대통령은 이어진 간담회에서 “성소수자들이 사회적으로 박해를 받거나 차별을 당해서는 안된다”면서도 “동성혼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지난 23일 열린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평등정책 토론회’에서 한희 활동가는 “동성커플이 동성혼을 못하는 것 자체가 차별”이라며 “차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발언”이라고 비판했다.

 홍성수 교수(숙명여대 법학부)는 23일 문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에 대해 자신의 페이스북에 “탈세, 병역, 직장 내 차별 등 국민의 삶 속에 존재하는 모든 불공정을 과감하게 개선하여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발언을 두고 “좋습니다. 직장 내 차별을 금지하는 게 바로 차별금지법입니다. 뭐라도 좀 해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해도 될는지”라고 밝혔다. 홍 교수는 지난해 말 ‘이화젠더법학’에 게재한 논문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필요성: 평등기본법을 위하여’에 “참여정부를 계승하는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지만 무슨 일인지 아직까지 기초적인 논의조차 시작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며 “2000년대 중반 이후 변화된 상황으로 인해 차별금지법 제정 필요성이 사라졌을 리가 없는데, 논의조차 없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밝힌 바 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10월을 ‘평등 한 달’로 선포하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여러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19일에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대규모 거리 집회를 열고 ‘우리는 원한다. 평등한 세상을’이라는 제목의 공동결의문을 낭독했다. “한국사회가 혐오로 물들고 있다. 혐오선동세력은 갈수록 악을 쓰고 있다. 인권도, 성평등도, 문화다양성도, 민주시민교육도 안 된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그런데 혐오는 저절로 번식하지 않는다. 정부와 국회가, 의회에 자리를 잡은 정당들이 두손 두발 다 들어 혐오의 텃밭을 키우고 있다. 2007년 차별금지사유의 삭제가, 이어진 차별금지법안 철회가 혐오의 자양분이 되었다. 이제 그 땅을 갈아엎고 평등을 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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