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에 얽매인 정책의 벽을 깨자, 함께 살자

2019.11.30 18:12 입력 2019.12.06 14:30 수정

2017년 6월 장혜영씨(32)는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중증발달장애인 동생 혜정씨(31)를 데리고 나왔다. 초등학생이던 혜정이가 산골에 있는 시설로 들어간 지 18년 만이었다. 이듬해 12월 동생과 함께 사는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을 선보이며 ‘탈시설’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장애인 인권활동가, 다큐멘터리 감독, ‘생각 많은 둘째언니’ 채널을 운영하는 유튜버 장씨는 최근 정의당에 입당하며 정치에 뛰어들었다. 장애가 있든 없든 누구나 지역사회에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다.

‘탈시설’이라고 하면 현재 시설에 있는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는 것만 생각하기 쉽다. 장씨는 “아직은 지역사회에 있는 한 사람이 언제든 시설에 보내질지 모르는 가능성을 방지하는 것까지 탈시설이 의미한다”며 “막 태어난 장애인도 시설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연함을 깨다

장애인 인권단체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에 따르면 한국에서 탈시설 논쟁이 본격화된 건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다. 이전까지는 시설에서 자행되는 인권침해나 비리에 대해 인권·장애인단체가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려서 사건별로 대응했다. 이때는 ‘시설 민주화’ 요구가 높았다. 하지만 성폭력·감금같이 심각한 인권침해뿐 아니라 단체생활, 보호라는 이유로 자기결정권을 제한하는 시설 자체에 의구심이 커졌다. 좋은 시설을 만들려고 하기보다, 장애인들이 왜 시설에 들어가게 됐는지 근본적인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바로 ‘탈시설 운동’의 시작이다. 장애인권 활동가들은 왜 장애인이 시설에서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지, 왜 정부는 장애인 지원정책을 시설정책으로만 일관하고 있는지 물음을 던졌다. 이들의 요구는 “동네에서 함께 살자”는 것이었다.

2009년 일명 ‘마로니에 8인’의 노숙투쟁은 상징적 사건이다. “더 이상 시설에서 살기 싫다.” 한 해 전 장애수당 갈취 등 비리가 있던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나온 장애인 8명이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두 달간 노숙농성을 벌였다. 이를 계기로 탈시설 장애인을 위한 자립생활주택이 생겼다. 서울을 시작으로 지자체 차원의 탈시설 정책이 수립됐다.

문재인 정부는 ‘장애인도 지역사회 정착생활이 가능한 환경을 조성’을 국정과제로 내걸었다. 아직 중앙정부 차원의 탈시설 계획은 없다. 장혜영씨는 ‘정책의 부재’를 지적했다. 장씨는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어 정책이 바뀔 때도 있지만 정책이 변화되면서 사람들 인식이 변화되는 경우도 있다. 탈시설 문제는 당연히 후자”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탈시설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시설에 사는 장애인이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사회로 돌아오는 것이고, 가족이 그 사람을 돌본다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서포트(지원)한다는 뜻이어야 한다. 시설에서 24시간 살던 사람이 지역사회로 돌아오려면 그에 맞는 활동지원서비스가 필요하다. 정책의 변화가 필요하다.”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중증·정신장애인 시설 생활인에 대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중증장애인 67%가 거주시설에 비자발적으로 입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44.4%가 ‘가족들이 나를 돌볼 수 있는 여력이 없어서’라고 그 이유를 답했다. 지난해 기준 장애인 거주시설은 624곳, 거주인원은 2만5000여 명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어른이 되면>을 연출한 장혜영씨(오른쪽)와 동생 혜정씨. /김영민 기자

다큐멘터리 영화 <어른이 되면>을 연출한 장혜영씨(오른쪽)와 동생 혜정씨. /김영민 기자

다양한 주거형태 고민해야

변화는 쉽지 않다. 시설보호 체계가 이미 탈시설을 추진한 서구와 많이 다르다. 서구의 경우 국가 주도로 시설보호가 시작됐고, 시설 개혁 역시 국가가 주도했다. 한국은 식민지와 전쟁을 겪으면서 서구의 시설보호제도가 들어왔고, 민간이 주도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유동철 동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한국은 사회복지 법인들이 주체이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시설을 폐쇄하거나 해산시킬 수 없다”며 “과거에는 거주시설이 장애인을 보호하는 정부의 정책 파트너였는데, 탈시설은 그 지위를 격하시키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부담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탈시설은 거스를 수 없는 큰 물줄기가 됐다. 추진 방식을 둘러싼 이견이 있을 뿐이다. 장애인 인권단체들은 시설의 규모를 축소하는 ‘소규모화’를 경계한다. 운영 주체, 관리방식이 동일하다면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시설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규모화는 실효성 있는 탈시설 전략이 될 수 없다고 본다. 한국장애인사회복지시설협회는 시설장 원탁회의, 내부 연구 등을 통해 탈시설에 따른 대안을 찾고 있다.

유 교수는 “탈시설 정책은 정부에서 방향을 확실히 잡고 강하게 추진하지 않으면 실패한다. 지금까지 서비스를 제공해온 당사자들이 탈시설의 의미에는 동의하지만 거부감이 큰 상황에서 속도감 있게 추진하지 않으면 반대의 벽을 뛰어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법인들과 충분히 대화하고 다양한 모델들을 구체화해 설득시켜야 한다. 법인과 싸울 문제는 아니다”라고 했다.

김진우 덕성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기존 시설에 살던 어떤 사람이 어떤 공간으로 움직여야 하느냐를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설계할 필요가 있다”며 “대규모 시설은 당연히 폐쇄해야 한다. 다만 ‘몇 명 이상이면 안 된다’는 형식논리에서 벗어나 대규모 시설의 집단거주 성격을 없앨 수 있는 다양한 거주공간의 유형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시설에 있는 사람들을 지금같이 지원 수준이 낮은 그룹홈(공동생활가정)으로 내보내는 게 탈시설이라는 건 아주 나쁜 논리”라며 “지원 수준을 높여 지역사회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게 탈시설”이라고 했다.

보건복지부는 내년 초 탈시설 정책을 담은 ‘지역사회 통합돌봄 로드맵’을 발표할 예정이다. 탈시설 개념, 서비스 전달 체계, 인력 배치, 기존 시설의 서비스 전환 등에 관한 내용이 담길 전망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한국의 현실을 고려해 기존 시설을 다양한 유형의 주거서비스, 재가장애인 서비스로 전환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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