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기획-2030 자낳세 보고서

①88년생 '돈알못'의 파산 후기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2020.10.06 06:00 입력 2020.10.06 07:07 수정

청년들의 투자 열기가 뜨겁다. 경향신문은 9월1일부터 30일까지 전국 20~34세 청년들에게 돈과 투자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많은 청년들이 투자를 통해 ‘경제적 자유’를 이루고 싶다고 했다. 일을 안 하거나 할 수 없게 되더라도 금융소득으로 생계 유지가 가능하게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밀레니얼 세대(1981년 이후 출생자)’와 ‘Z세대(1997년 이후 출생자)’ 사이에 널리 퍼지고 있는 이같은 인식을 들여다보기 위해 금융지식 공유 스타트업 ‘캐컴’을 취재한 내용을 후기 형태로 전한다.

경향신문 기자들이 스타트업 캐컴이 보드게임을 통해 제공하는 ‘금융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경향신문 기자들이 스타트업 캐컴이 보드게임을 통해 제공하는 ‘금융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이것은 나의 파산에 대한 회고이다. 다행히, 게임에서 말이다.

금요일 밤 우리 넷은 마스크를 쓰고 역삼역 인근의 회의실에 모여 앉았다. 사회부 심윤지(28), 사진부 권도현(32), 경제부 박광연(30) 그리고 나.

텅빈 대차대조표와 연필, 계산기, 그리고 쥐 모양 말이 우리 앞에 주어졌다. 90분간 진행되는 이 게임의 목표는 ‘쥐탈출’. 쳇바퀴 돌듯 월급 기다리는 삶을 벗어나려면, 나 말고 돈이 벌어온 돈, ‘불로소득’이 지출보다 커야 한다고 했다. 이를 달성하면 패스트트랙을 달려 꿈을 이루게 된다.

주사위를 던져 말을 옮기면 우리네 인생에서처럼 돈 쓸 일도 찾아오고 돈 벌 기회도 찾아온다. 뭔가 선택할 때마다 각자 계산기를 두드려 자신의 대차대조표를 고쳐 쓴다.

나는 애초에 직업 카드를 잘못 뽑았다. 옆자리의 심은 의사가 됐는데 나는 트럭운전수였다. 월급이 대여섯 배 차이가 났다.

시작한지 얼마 안 돼 내 말이 ‘출산’에 멈췄다. “와! 축하합니다!” 게임규칙에 따라 모두가 박수를 쳤다. 내 입에선 “헐” 소리가 나왔다. 재무제표에 육아비용을 더하자 현금흐름이 즉시 반토막이 났다. 카드를 뒤집으면 이따금씩 투자기회가 주어졌지만 내게 주어진 돈으론 살 게 마땅찮았다. 찔끔 주식을 사 봤지만 별 도움이 안 됐고 부동산은 시도도 못했다.

주사위 말이 ‘해고’에 멈췄을 때 “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월급은 끊기는데 대출금은 계속 내야했다. 아이가 또 태어났을 때는 맙소사, 육성으로 “아아악”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나는 안심하고 있었다. 심을 빼면 우리 다 고만고만한 것 같아서였다. 맞은편 권은 나보다 월급 쬐금 더 받는 교사, 대각선의 박은 나보다도 더 못 받는 정비공. 우리 중 그래도 박이 이재에 밝긴 하다. 평소 동기들이 하겐X즈 아이스크림이나 마카롱 사먹는 걸 보면 돈 못 모은다고 잔소리하는 게 그의 역할.

박은 우리들 주사위가 구르는 동안 자신의 대차대조표를 열심히 들여다보더니 기본값으로 주어진 빚부터 척척 갚았다. 이자로 나가는 돈을 줄여 현금흐름을 확보해 투자에 쓰려는 것이었다. 그제야 내 부채란을 자세히 들여다봤을 땐 이미 현금이 없어 빚을 줄일 방법이 없었다. 옆에서 의사 선생 심이 투자를 거듭해 대차대조표를 바쁘게 썼다 지웠다 하는 동안 나는 멍하니 앉아있을 밖에.

“저, 할 것 같은데요?” 게임종료 3분을 남기고 박이 말했다. 어느 순간부터 빚 쭉쭉 당겨 이것저것 사모으더라니, 쥐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박의 말은 패스트트랙으로 나가고 이젠 주사위도 한 개가 아닌 두 개로 던지는 것이었다. 심이 옆자리에서 허탈한 듯 불만을 터뜨렸다. “이렇게 많이 버는데도 나는 왜 안돼!”

박도 게임 종료 삼십분 전에 출산에 당첨됐다. 그러나 나와는 상황이 달랐다. 이미 자산축적과 그에 따른 금융소득이 궤도에 오른 후라 아무 타격이 없는 듯 했다.

심에겐 기본값으로 주어진 주택대출과 학자금대출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권은 부동산엔 진입조차 할 수가 없었다며 슬퍼했다. 게임이 종료되자 매니저 이은수씨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어찌나 답답하던지! 두 분이 대출을 엄청 두려워하시더라고요!” 놓쳐버린 기회들에 대한 설명을 듣고 권과 심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나는 쳇바퀴의 굴레 안에 남았을 뿐 아니라 파산까지 했다. “기자님은 운이 나빴던 거예요. 세 번 해고당하고 애도 둘이나 낳았잖아요.” 그저 게임일 뿐인데, 운이 나빴을 뿐이란 말이 위로가 되지 않았다.

캐컴은 이 쥐탈출 게임을 활용해 금융지식을 공유하는 스타트업이다. 이곳 대표인 이씨는 국내 식품 대기업에서 3년여를 일하다가 올해 퇴사했다고 한다. 몇해 전 쥐탈출 게임을 해보고 큰 충격을 받은게 계기가 돼 투자를 시작했다고 했다. 승진, 연봉, 카드값, 아이 학원비…. 선배들 사는 걸 보니 그게 사는 건가 싶었다고 한다.

이씨는 “돈을 모르고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건 노예를 자처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지금은 신분제 사회가 아니잖아요. 부자될 방법이 있는데 왜 시기, 질투, 동경만 해요?” ‘난 안 될거야’ 말하는 친구들 보면 정신 차리게 해 주고 싶단다. 캐컴이 투자를 받게 되면서 부업으로 하던 매니저 일을 올해부터는 본업으로 하게 됐다. 다들 여기 와서 돈 얘기 좀 실컷 했으면 좋겠다고.

이씨와 공동대표인 김주환씨(25)도 짧은 회사 생활을 해 봤다. 과장님, 부장님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저토록 훌륭한 능력을 갖췄는데 잘 돼도 저 모습이라니. 인천국제공항공사 취업을 목표로 편입을 준비 중이었는데, ‘나인투식스’의 삶으론 부자 근처에도 못 가겠다고 생각해 진로를 틀었다. 부자 되는 방법을 부자만 아는 건 부당하다는 생각으로 캐컴 일을 맡았다.

금융지식공유스타트업 캐컴 이은수 대표(왼쪽)과 김주환 대표가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금융지식공유스타트업 캐컴 이은수 대표(왼쪽)과 김주환 대표가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게임이 끝난 후 우리는 곧 두 사람의 활기와 총기에 압도당했다. 이씨는 ‘스타벅스 커피 마실 돈으로 스타벅스 주식 한 주를 사라’는 경구를 일상에서 실천하고 있었다. 지난주에는 버스를 타고 판교를 지나다 네이버 사옥 옆에 이 회사 새 건물이 올라가는 걸 보고 네이버 주식을 더 샀다고 했다. 치킨을 먹다가 양념이 훌륭하면 이런 건 어디서 만드는지 관련 기업 주식을 찾아 본다고도 했다. “기업분석, 가치투자, 이런 것 몰라도 시작할 수 있어요. 완벽하려고 생각하면 돈 언제 벌어요.”

박이 미국 인덱스 펀드로 10%대 수익을 내고 있다고 밝히자 이씨가 눈을 반짝이며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의 뜻이었다. “밤에도 돈 벌고 계시네요.”

두 사람에게 순수하게 자기 돈으로 시작한 투자로 얼마를 모았냐고 물어봤다. 그동안 서로도 공개하지 않았던 눈치였다. 둘다 현재 ‘굴리는’ 돈이 1억원 정도라고 했다. 4년 넘는 회사생활로 얼추 이 정도 모은 게 큰 자랑이던 박이 흠칫하는 게 느껴졌다. 수익률을 묻자 이씨가 30%정도라고 했다. “아뇨. 더 먹을 수 있었는데요.” 몹시 높은 것 아니냐는 감탄이 이씨 말에 잘렸다.

“대표님은 목표가 뭔가요?” 박이 이씨에게 물었다.

“서른에 은퇴요. 지금 제가 스물 셋이니까요.”

둘러앉은 우리 모두 마스크 안에서 벌어진 입을 한동안 다물지 못했다. 서른…. 심은 이 년, 박은 일 년 남았네….

그는 98년생. 나는 88년생. 우리는 열 살 차이가 난다. 나는 저때 뭘 하고 있었지? 이 분은 내 나이 땐 뭘 하고 있을까.

특성화고를 다닌 이씨는 졸업 후 대학에 가지 않고 곧바로 취직을 했다. 무역과 금융에 흥미를 느껴 투자자문사를 찾아다니고 관련 책과 유튜브 콘텐츠를 섭렵하며 돈 공부를 했다고 한다. 지금 투자해 모은 돈으로 서른엔 월급에 매이지 않고 금융소득을 굴려 생활하면서 하고싶은 사업을 구상할 거라고 했다.

대학 문을 나온지 올해로 꼭 10년째. 세 군데 직장을 거치며 쓰고 남은 돈은 대충 전세금에 처박아둔 내 머릿속에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아니야, 그래도 ‘밀레니얼’인데 선곡을 바꿔야지. ‘넌 멍청이! 트윗! 트윗! 트윗! 트윗!’ 그동안 우리들 앞에 위풍당당하던 박도 어깨가 축 내려간 것이 생각이 많아진 듯 했다.

“여러분, 시장의 공황은 기회란 걸 꼭 기억하세요. 주식시장에서 시간은 젊은 사람들 편이니까요.” 카페를 떠나는 우리를 배웅하며 이씨가 이렇게 말해주었다. 요즘 가는 곳마다 한숨 뿐인데, 어디서도 들지 못한 희망의 말들이 이곳에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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