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안전성평가 조작' 서울대 교수 무죄에 피해자들 “면죄부... 사법부 존재 이유 뭐냐”

2021.04.29 17:51 입력 2021.04.29 22:27 수정

가습기살균제 참사에 가장 큰 피해를 안긴 옥시레킷벤키저(이하 옥시)의 요구에 따라 독성 실험 결과를 조작했던 서울대 교수에 대해 대법원이 면죄부나 다름없는 판결을 내리면서 피해자, 시민단체 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과 시민단체로 이뤄진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가습기넷)는 29일 논평을 통해 “사법부는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진상을 조작하고 은폐하려는 가해기업들이 건넨 뒷돈을 받고 연구자의 양심을 판 ‘청부과학자’에 면죄부를 쥐어주고 말았다”며 “탐욕으로 뭉쳐진 이들의 동맹에 최소한의 법적 책임조차 묻지 못하는 사법부를 규탄한다”고 밝혔다.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 관계자들이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본점 앞에서 신세계 이마트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 관계자들이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본점 앞에서 신세계 이마트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또 환경보건시민센터는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2심후4년이나 끌어온 끝에 나온 ‘장고 끝의 악수’와 같은 것”이라며 “이번 판결은 세 달 전인 1월 12일 SK, 애경, 이마트 및 필러물산 등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과 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 성분의 가습기살균제 제조판매기업들 및 PHMG원료 공급한 기업들에 대한 1심 무죄판결에 연이은 가습기살균제 사건 핵심관계자들에 대한 무죄 판결이어서 충격적”이라고 밝혔다.

대법원은 이날 옥시 제품의 흡입 독성 실험결과를 조작해 증거 위조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조명행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의 증거 위조와 수뢰 후 부정처사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항소심 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이 다만 연구용역비 일부를 다른 용도로 쓴 사기 혐의만 유죄로 인정하면서 조 교수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조 교수는 옥시가 서울대 산학협력단과 맺은 ‘가습기살균제의 안전성평가’ 연구책임자였다. 조 교수는 2011년 10월 옥시가 서울대에 지급한 실험 연구용역비 2억5000만원과 별도로 자문료 명목의 1200만원을 개인 계좌로 받았으며 옥시에 불리한 연구 데이터를 일부러 조작하거나 누락한 최종결과 보고서를 써줬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상고심 선고가 있던 2018년 1월 25일 가습기살균제피해자가족모임과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 관계자들이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존 리 전 옥시 대표의 무죄 선고와 신현우 전 대표의 징역 6년 선고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상고심 선고가 있던 2018년 1월 25일 가습기살균제피해자가족모임과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 관계자들이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존 리 전 옥시 대표의 무죄 선고와 신현우 전 대표의 징역 6년 선고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이는 신현우 전 옥시 대표 등 옥시 임직원들의 형사사건 증거를 위조한 혐의로도 연결된다. 옥시는 질병관리본부가 2011년 8월 ‘가습기 살균제가 원인 미상 폐 질환의 위험 요인으로 추정된다’는 역학조사 결과를 발표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조 교수에게 해당 실험과 보고서를 맡긴 바 있다. 옥시는 문제의 보고서를 받아 가습기살균제 제조·판매로 인한 업무상 과실치사상 사건을 수사 중이던 경찰에 제출하면서 옥시 임직원들의 형사 사건에서 가습기살균제와 폐 손상 사이의 관련성을 부정하는 근거 자료로 사용한 바 있다.

조 교수에 대해 1심 재판부는 2016년 “해당 최종결과보고서는 옥시 쪽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이용됨으로써 수사·사법권의 적정한 작용에 대한 위험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피해 원인을 파악하는 데 장애요소 중 하나가 돼 진상규명이 지연됐다”며 혐의를 모두 인정하고, 징역 2년과 벌금 2500만원에 추징금 1200만원을 선고했다. 항소심 재판부가 2017년 무죄 판결을 내렸지만 이듬해인 2018년 말 서울대 연구진실성위원회는 “서울고등법원 판결(항소심) 타당성에 의문이 간다”며 조 교수가 해당 연구자료를 조작하고 연구데이터를 축소·왜곡했다는 판단을 내린 바 있다.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도 2019년 대법원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연구자가 기업으로부터 금전을 지급받고 기업의 요청에 따라 기업에 불리한 실험 데이터를 의도적으로 누락한 행위는 연구부정 행위”라고 규정한 바 있다.

당시 사참위는 조 교수 사건에 대해 “연구 부정행위 문제에 대해 사실상 법리적으로 처음 검토되는 사례”로서 “학문의 자유와 연구용역을 의뢰한 기업에 유리한 결론을 내리는 행위는 명확히 구분되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참위는 이어 “의도적 편파적 연구 데이터 누락과 삭제는 명확한 연구 부정행위”이고, “연구 부정행위는 국민건강 및 복지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므로 더 엄격하게 규제되어야 마땅”하다고 밝혔다.

지난 13일 오후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열린 가습기 살균제 참사 책임촉구 기자회견에서 환경보건시민센터 관계자 및 피해자들이 환경부를 규탄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3일 오후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열린 가습기 살균제 참사 책임촉구 기자회견에서 환경보건시민센터 관계자 및 피해자들이 환경부를 규탄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이번에 대법원은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자문료가 연구와 관련된 직무 행위 대가로서의 성질을 가진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하다”며 조 교수에 대한 증거위조와 수뢰 후 부정처사 혐의를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가습기넷은 “옥시는 왜 조 교수에 연구용역비 외에 거액의 자문료까지 개인 계좌를 통해 따로 챙겨줬고, 조 교수는 자문료를 받은 뒤 제품 독성 실험을 조작·누락한 보고서까지 작성해 옥시에 넘겨준 것인가? ‘직무 행위 대가’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물었다. 이 단체는 또 “항소심 재판부와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기업들과 윤리의식을 내던진 연구자들이 연구 조작·왜곡을 통해 이익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 것이나 다름 없다”며 “소비자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고, 실체적 진실까지 숨기고 가릴 수 있다는 점에서 사법부의 무책임한 판결에 분노한다”고 밝혔다.

가습기넷은 이어 “자신들의 잘못을 가리고 감추려는 가해기업들에 맞서는 소비자들에게 진실을 밝히고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할 책무를 지닌 사법부가 진상 규명을 가로막는 이들에 최소한의 형사 책임조차 묻지 못한다면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지적했다.

환경보건시민센터는 “잇따른 법원의 가습기살균제 관련자 무죄판결로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진상규명은 점점 아득해져가고 있다”며 “진실과 사법정의를 구현해야 하는 법조계는 살인기업과 청부과학자의 편에 섰고, 환경부는 촛불정신을 왜곡시키며 가습기살균제 진상규명과 피해대책 그리고 재발방지를 위해 존재하는 사회적참사특조위의 진행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