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도 때론 달콤한 도넛의 유혹에 굴복하고 싶다

2021.05.25 15:06 입력 2021.05.28 17:15 수정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 프랑스의 미식가 브리야사바랭이 <미식예찬>(1825)에 쓴 문장입니다. ‘먹을 것’ 이야기는 개인의 식탁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산업, 농업, 경제 그리고 문화, 환경 등 다양한 분야와 연결돼 있습니다.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죠. ‘장르’를 불문하고 ‘먹을 것에 진심인 사람들’을 지금, 만나러 갑니다.


회현역의 비건 도넛가게 오베흐트

도넛이란 존재. 매일 먹기엔 좀 걱정되는데 가끔 정말 필요한 날이 있다. 종일 업무에 시달려 뇌가 탈진한 느낌이 들 때, 가게로 뛰쳐들어가 뜨거운 차 한 잔 후루룩 마셔 가며 도넛 한 게를 먹고 나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뭔가를 다시 해볼 용기가 나는 것이다.

가축에 대한 계속되는 살처분과 동물학대 문제로 마음이 영 편치 않았던 나는 몇 달 전부터 계란과 우유를 끊었다. 집에서는 두유나 아몬드드링크 등으로 충분히 대체가 가능한데 밖에 나가면 제약이 많이 생긴다. 단 게 당겨도 디저트엔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다.

식물성 재료로만 만든 도넛이라면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다. N서울타워가 올려다보이는 서울 퇴계로 뒷골목에 올해 초 문을 연 오베흐트는 동물성 재료 없이 만든 도넛으로 비건들 사이에서 빠르게 입소문을 탔다.

※비건(vegan)
동물에게서 나온 식재료를 섭취하지 않고 동물의 부산물을 이용해 만들거나 동물실험을 거쳐 제조한 제품을 소비하지 않는 생활방식 또는 이런 생활방식을 지향하는 사람.

서울 중구의 비건 도넛가게 오베흐트 앞에 이 가게 대표 김애리씨(오른쪽)와 직원 김소라씨가 나란히 섰다. 최유진 PD

서울 중구의 비건 도넛가게 오베흐트 앞에 이 가게 대표 김애리씨(오른쪽)와 직원 김소라씨가 나란히 섰다. 최유진 PD

지난 6일 서울 중구의 매장에서 오베흐트 대표 김애리씨(35)와 직원 김소라씨(27)를 만났다. 이곳은 외식 메뉴 개발 일을 해오던 애리씨가 연 첫 가게다. 비건 음식은 맛이 없을 것이라는 세간의 편견을 깨고, 비건도 원하는 방식의 쾌락을 누릴 수 있도록 길을 열고 싶다고 한다. 녹색당 소속의 정치활동가로 일하는 소라씨는 가치관에 부합하는 직장을 만나 기쁘다고 했다.

초록색으로 장식된 작은 가게의 외벽에는 ‘식물성 도넛(plant-based donuts)’이라고 써 있다. 도넛 6개가 들어가는 포장 상자에는 이런 문구가 써 있다. ‘비건을 위한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 for Vegan)’.

- 도넛 상자에 추구하는 바가 다 드러난 것 같네요.

애리 = ‘비건? 맛은 모르겠고 건강하니까 먹는 거겠지’ 라고 하는 분들을 많이 만났거든요. 그 선입견을 깨고 싶었어요. 도넛은 어차피 맛으로 먹는 거잖아요. 누구나 편견 없이 다가올 수 있었으면 해서 가게 앞에는 굳이 ‘비건’이라고 쓰지 않았어요. 여기가 오피스 상권이거든요. 인근의 2030 직장인들이 편하게 찾아오셨으면 했어요. 맛있네, 근데 알고 보니 비건이었네? 이렇게 문턱을 낮추고 싶었던 거죠.

소라 = 저는 ‘길티 플레저’(약간의 죄의식을 동반하는 즐거움을 일컫는다. 열량이 높은 음식을 즐기는 기쁨을 표현하는 데도 자주 쓰이는 표현이다.)를 추구하는 데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윤리적 이유로 비건을 하고 있고 관련 활동을 하는 사람인데, 비건도 충분히 맛있고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거든요.

- 비건 아이템으로 사업을 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하게 됐나요.

애리 = 2019년 즈음 일반 도넛 가게에서 메뉴 개발 의뢰가 들어왔어요. 연구차 만든 도넛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더니 어느 비건 팔로워께서 “이런 것도 비건으로 좀 만들어 주세요!” 하시는 거에요. 그때 생각했죠. ‘크리스피크림이나 던킨이나 다 튀김빵인데 왜 비건 버전으론 안 팔까. 요리도 할 줄 알겠다, 비건 요리도 해 왔겠다, 내가 만들어 봐야지.’

김애리 오베흐트 대표는 비건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도넛을 개발하고 싶었다고 한다. 최유진 PD

김애리 오베흐트 대표는 비건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도넛을 개발하고 싶었다고 한다. 최유진 PD

- 가게를 열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어요.

애리 = 쭉 외식업 관련 일을 해왔어요. 중학교 때부터 요리 학원에 다니면서 자격증을 취득했고 조리고에 진학했다가 학교를 그만두고 유학을 갔어요. 영국과 호주, 한국에서 푸드 스타일링과 메뉴 컨설팅 등 여러가지 일을 했습니다.

- 비건 요리는 언제 처음 접하셨나요.

애리 = 건강 때문에 채식과 사찰요리 등에 관심이 많았는데, 2018년 즈음 케이터링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비건 음식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됐어요. 전시·기업 행사에 내놓을 음식을 비건으로 준비해 달라는 요청이 꽤 들어오더라고요.

- 건강상의 이유로 채식을 하셨다고요?

애리 = 10년 전 즈음 신장 이식 수술을 받았거든요. 신장이 약한 사람은 단백질을 과도하게 섭취하면 신장에 무리가 간다고 하더라고요. 자연스럽게 육식을 줄이게 되었고 엄격한 비건은 아니지만 채식을 지향하는 채로 생활해왔습니다.

- 소라씨는 언제부터 비건으로 생활해 오셨나요?

소라 = 2016년 황윤 감독의 다큐멘터리 <잡식가족의 딜레마>를 보고 ‘페스코 채식’(육고기는 피하고 동물의 알과 젖, 어류 등 해산물은 섭취)을 시작했어요. 2019년부터는 비건을 지향하고 있고요.

- 오베흐트에는 어떻게 직원으로 취직하게 되셨어요.

소라 = 저는 환경운동을 해왔거든요. 처음에는 탈핵운동에 관심이 있어서 녹색당을 찾아갔는데, 가보니 생명권, 동물권, 페미니즘 등을 다양하게 포괄하는 활동을 하고 있더라고요. 지금은 저 스스로를 녹색정치활동가라고 소개하고 다녀요. (현재 녹색당 내 청년조직인 청년녹색당의 공동위원장이다.) 생업으로 가급적 가치관이 맞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오베흐트를 알게 되어서 사장님과 면접을 봤는데 마음이 너무 잘 맞아서 함께하게 됐어요.

동물성 재료를 쓰지 않고 만든 오베흐트 도넛. 최유진PD

동물성 재료를 쓰지 않고 만든 오베흐트 도넛. 최유진PD

‘그런데 사장님도 도넛을 드시나요?’ 애리씨가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소라씨에게 물었다. “하루 세 개씩 드세요, 맛있다고…”

- 애리씨는 건강상의 이유로 채식을 시작하셨는데도 길티 플레저를 추구하시는군요(웃음).

애리 = 건강하게 먹는 건 너무 중요하죠. 그런데 저는 건강만 강요받는 건 싫어요.

소라 = 채식을 한다고 하면 뭔가 욕망을 절제하고 ‘스님처럼’ 사는 걸 떠올리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물론 저도 ‘정크 비건’(열량이 높고 영양 불균형한 식물성 음식을 주로 섭취하는 방식)을 추천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맛있는 걸 일부러 안 먹고 욕구를 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건 채식인에 대한 흔한 편견이기도 하고요.

애리 = 비건에 관심이 없는 손님들이 도넛이 맛있다고 다시 찾아와주실 때 너무 기분이 좋아요. 그게 제가 원했던 것이고요.

인터뷰에 앞서 도넛을 몇 개 사서 맛보았다. “이게 비건이라고요? 전혀 다르지 않은데…” 동행한 최유진 PD는 이런 반응을 보였다.

- 동물성 재료를 안 넣어도 도넛이 잘 만들어 지는군요. 뭘 넣고 만드나요?

애리 = 보통 도넛에 계란과 우유, 버터가 들어가요. 저는 우유 대신 두유를 넣고, 버터 대신 코코넛오일을 넣고 있어요.

- 콩이나 코코넛 냄새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텐데, 도넛에서 그런 맛이 느껴지지는 않았어요.

애리 = 하니까 되긴 되더라고요. 처음에 도넛 기계를 돌릴 때 여러 번 실패했죠. 도넛이 봉긋하고 예쁘게 나와야 하는데 납작하게 나온다든지, 식감이 ‘퐁신퐁신’(폭신폭신) 해야되는데 질기게 나온다든지. 여러 번 좌절을 겪고 레시피를 수정해 나가면서 지금의 맛이 나온 거죠.

오베흐트 도넛 포장상자.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기 위해 상자를 받지 않고 직접 준비해온 다회용 용기에 도넛을 싸 가는 손님도 많다고 한다. 최유진 PD

오베흐트 도넛 포장상자.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기 위해 상자를 받지 않고 직접 준비해온 다회용 용기에 도넛을 싸 가는 손님도 많다고 한다. 최유진 PD

- 손님들과 비건에 대한 얘기를 자주 나누나요?

소라 = 그렇죠. 사장님도 손님들이 계산을 할 때나 도넛을 고를 때 정적이 흐르거나 뻘쭘한 시간이 이어지면 ‘이거 비건인 걸 아시냐’ 곧잘 물어봅니다. 한 입 드셨을 때 이렇게 물어보면 ‘아, 진짜요?’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소라씨는 군대, 학교, 병원 등의 공공급식에서 채식선택권을 보장하라는 내용의 진정을 국가인권위에 내고, 공공급식에서 채식을 선택할 권리를 헌법에 명시하라는 내용의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녹색당 활동에 참여해왔다.

- 비건으로서 이런 매장에서 일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소라 = 제가 비건 당사자들의 인권 침해 사례를 수집하고 관련해서 고발하는 활동을 2년간 해 왔어요. 디저트를 파는 매장에서 비건들을 만나는 건 또 다르더라고요. 웃는 얼굴의 비건들을 볼 수 있는 게 너무 좋아요. ‘비건 도넛을 맛보러 부산에서 왔다’ 하는 분도 계시거든요. 온라인 상에서 채식 관련 담론이 점점 커지고 활발해지는 게 느껴지는데, 그런 변화를 카페라는 오프라인 공간에서 피부로 느끼게되는 것 같아요.

김소라씨는 오베흐트에서 일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받아들고 즐거워하는 비건들을 만나는 게 행복하다고 한다. 최유진 PD

김소라씨는 오베흐트에서 일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받아들고 즐거워하는 비건들을 만나는 게 행복하다고 한다. 최유진 PD

애리 = 지난해부터 채식이나 비건에 관심을 가지는 분들이 확 늘어난다고 느꼈거든요. 올해는 더 많아지는 것 같아요. 그냥 도넛 가게인 줄 알고 왔다가 ‘비건이에요’ 하면 “와!” 하고 반가워하는 분들이 많이 계세요.

포장용기를 미리 준비해 매장을 방문하는 손님도 많다. 인스타그램에서 ‘#용기내챌린지’를 검색하면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음식을 미리 준비한 통에 담아가는 장면을 남긴 인증샷을 흔히 볼 수 있다. 오베흐트도 ‘용기내챌린지’ 캠페인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포장용기를 준비해온 손님에게 도넛 한 개를 무료로 준다.


- 쓰레기 배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는 자영업자도 손님도 점점 늘어나는 것 같네요.

소라 = 도넛위에 올린 크림을 망가뜨리지 않고 가져가려고 미니밥솥을 가져온 손님도 계세요.(웃음) 부산에서 오신 손님은 김치통 만 한 통을 몇 개나 가져오시고….

- 비건 요리를 개발하는 데서 어떤 종류의 기쁨을 느끼시나요.

애리 = 저는 그동안 수많은 요리를 해 봤는데 비건 요리가 특히 재밌는게 뭐냐면, 뭔가 맛있는 걸 먹었을 때 ‘아, 이걸 어떻게 비건요리로 바꿔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거에요. 비건들에게는 선택지를 늘려줄 수 있고 비건이 아닌 분들에게도 ‘굳이 이렇게 동물성 재료를 쓰지 않아도 충분히 맛있게 먹을 수 있어요’ 하고 알리는 과정이 어렵긴 한데 너무 재밌어요.

- 사업적으로도 괜찮은 영역이라고 보시나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해서 시작한 거죠! 비건은 맛도 없는데 비싸기까지 해, 이런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아요. 맛도 있고 재미도 있고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도넛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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