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검찰·법원의 ‘2차 가해’…장벽에 부딪힌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

2021.06.16 15:46 입력 2021.06.16 18:38 수정

휴먼라이츠워치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 보고서 표지.

휴먼라이츠워치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 보고서 표지.

최지은씨(가명)는 2018년 자신의 집에서 불법촬영을 당했다. 가해자는 인근 건물에서 최씨를 2주 동안 촬영했다고 경찰에 자백했다. 최씨에 따르면 법원은 가해자에게 “직업이 있고, 최근에 결혼을 했고,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있기 때문에 (형량) 결정을 내리기가 아주 어려웠다”며 징역형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영상이 흐릿하고 가해자가 영상을 유포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점도 양형에 참작 사유가 됐다. 최씨는 미국에 본부를 둔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와의 인터뷰에서 “징역도 안 살고 벌금도 안 내요. 그 남자는 예전처럼 계속 살 수 있는 거죠”라고 말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16일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는 최씨를 비롯한 디지털 성범죄 생존자 12명의 인터뷰가 담겨 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이 법적 대응을 할 때 수사기관과 법원에서 큰 장벽에 직면한다고 지적했다. 휴먼라이츠워치와 인터뷰한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강유진씨(가명)는 검사로부터 “가해자가 500만원도 안 되는 벌금형을 받을 건데 그래도 기소를 하실 건가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또 다른 피해자 임예진씨(가명)는 경찰이 아무 조치를 하지 않는 것에 화가 나 “내가 이걸로 신체적 손상을 입어야만 조치를 할 거냐”고 물었고, 경찰로부터 “그렇다”는 답변을 들었다.

휴먼라이츠워치 보고서에 따르면 검찰은 2019년 기준 성범죄 사건의 46.8%에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불법촬영, 촬영물 무단 유포, 아동 및 청소년 성착취물 제작·유통으로 한정된 성폭력 사건에서도 불기소 처분율이 43.5%에 달했다. 같은 기간 살인 사건과 강도 사건의 불기소율이 각각 27.7%, 19.0%인 것과 대비된다.

가해자가 재판에 넘겨져도 그들이 받는 형량은 가벼웠다. 휴먼라이츠워치가 대법원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성폭력처벌특례법상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허위영상물 등의 반포·촬영물 등을 이용한 협박 및 강요’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1849명 중 징역형의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371명에 그쳤다. 그 외 징역형의 집행유예가 910명, 벌금형이 439명, 벌금형의 집행유예가 7명, 선고유예 20명 등이었다. 판사가 합의를 종용했다는 피해자도 있었다. 이예린씨(가명)는 “판사는 ‘합의를 하지 그러냐? 재판이 계속 진행되면 너한테 좋을 것이 없다’고 했다. 어떻게 판사가 감히 피해자에게 합의를 하라고 말할 수 있냐”고 말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형사상 대응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가해자가 받는 처벌이 생존자가 겪는 피해 수준에 상응하지 않는다는 점”이라며 “대부분 가해자에게 선고되는 형량이 지나치게 낮아 (성범죄 피해) 생존자들이 신고를 포기하게 만들고 가해자가 처벌을 받는 경우에도 ‘이 범죄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고 밝혔다. 휴먼라이츠워치는 경찰청, 대검찰청, 대법원에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경찰관과 판·검사들을 교육하고 디지털 성범죄 담당 부서와 고위직에 여성의 수를 늘릴 것을 한국 정부에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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