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죽어도 일해라?…배송 수행률 낮으면 노동자 ‘클렌징’하는 쿠팡

2023.05.24 16:28 입력 2023.05.25 09:57 수정

배송 권역 박탈에 사실상 ‘해고’ 상태

정해진 수행률 미달성 땐 ‘구역 회수’

노조 “‘클렌징’ 무기 삼아 상시 해고”

민주노총 전국택배노동조합 조합원들이 24일 서울 강남구 쿠팡 CLS 본사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상시해고 제도(클렌징) 폐지와 고용안정 보장 등을 촉구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민주노총 전국택배노동조합 조합원들이 24일 서울 강남구 쿠팡 CLS 본사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상시해고 제도(클렌징) 폐지와 고용안정 보장 등을 촉구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쿠팡 배송(퀵플렉스) 기사로 일하는 A씨(32)는 최근 할머니 상을 치르느라 이틀간 일하지 못했다. A씨는 장례를 마치고 복귀한 뒤 ‘황당한’ 소식을 들었다. 본사 측이 업무 수행률이 낮다는 이유로 A씨가 담당하던 배송 권역을 박탈했다는 것이다. 배송 권역이 사라져 일감이 없어진 그는 사실상 ‘해고’ 상태다.

A씨는 24일 통화에서 “지난 화요일(23일) 평소처럼 출근했는데 이제 일감이 없다는 얘기만 전해 듣고 돌아와야 했다”면서 “다른 일도 아니고 장례 때문에 수행률이 낮아진 것인데 이조차 고려를 안 해주는 게 너무 당황스럽다”고 했다. 그는 “아이가 7살이라 마냥 쉬고 있을 수도 없어서 빨리 다른 일을 알아보려 한다”고 했다.

쿠팡 배송 기사들은 A씨와 같은 상황을 두고 “클렌징 당했다”고 표현한다. ‘클렌징’이란 쿠팡로지스틱스(CLS) 본사의 업무 지침으로, 특정 구역에서 정해진 수행률을 달성하지 못하면 위탁계약 관계인 영업점에 ‘구역 회수’를 통보하는 것이다. 전국택배노조 쿠팡지회는 이날 서울 강남구 CLS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본사가 ‘클렌징’을 무기 삼아 상시 해고를 일삼고 있다”며 “A씨가 속한 영업점에 지난달 노조가 생겨서 이를 억누르려기 위한 조치 아니냐”고 했다.

기사들은 쿠팡CLS의 ‘클렌징’ 제도에 불만을 표하면서도 마땅히 대응할 방법이 없다고 토로했다. 쿠팡 퀵플렉스 기사들은 쿠팡 본사와 직접 계약을 맺는 게 아니라 영업점을 통한 간접 계약 방식으로 일하기 때문이다.

본사와 대리점 간 계약도 본사에 기울어져 있다. 경향신문이 확보한 쿠팡CLS와 대리점 간 계약서 제3조는 “본 계약은 영업점에 어떠한 독점적인 권리 또는 최소 물량 또는 고정적인 물량의 위탁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돼 있다. 정해진 물량이나 구역이 없으니 언제든지 일감을 회수해도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는 의미다.

김은진 서비스연맹법률원 변호사는 쿠팡CLS가 규제를 피해 편법을 쓰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 변호사는 “생활물류법은 본사가 표준계약서에 따라 영업점에 ‘일정한 구역’을 할당하도록 명시하지만, 이를 어겼다고 해서 과태료를 내거나 별도의 형사 처벌을 할 수 있도록 정하지는 않았다”면서 “쿠팡은 이러한 규제 사각지대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다른 택배회사는 기준에 못 미친다고 일을 못 하는 상태로 만들지는 않는다”고 했다.

이에 대해 쿠팡 관계자는 “CLS는 택배 기사의 계약 해지에 관여할 수 없다”면서 “A씨의 해고가 사실이라면 (본사가 아니라) 영업점이 A씨를 다른 노선으로 투입하지 않고 해고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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