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권고 후 12년 미적댄 출생통보제, 뒷북으로 ‘속전속결’

2023.07.03 08:30

2000년에도 검토했지만 ‘호적’ 프레임 갇혀 무산

미등록 이주민 자녀 등 빠져 아직은 ‘반쪽’ 정책

서울의 한 병원 산부인과 신생아실에서 간호사들이 아기를 돌보고 있다. 김영민 기자

서울의 한 병원 산부인과 신생아실에서 간호사들이 아기를 돌보고 있다. 김영민 기자

[주간경향] 2236명.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의료기관에서 태어났지만,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아동의 숫자다. 감사원은 올해 보건복지부 정기감사에서 이 사실을 파악하고 2236명의 1%인 23명의 신생아를 추적했다. 수원의 한 산모가 2명의 신생아를 출산한 뒤 살해해 냉장고에 보관한 사건은 이 과정에서 드러났다. 생후 76일 만에 영양결핍으로 사망했거나, 출생 직후 보호자가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버린 사례도 확인됐다.

미등록 영아의 살해·유기 사건이 속속 드러나자 정부와 국회는 “출생통보제를 도입하자”며 한목소리를 냈다. 현행 가족관계등록법에선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을 경우 아동은 정부의 보호망에 들어올 수 없다. 출생통보제는 이 같은 신고 누락을 방지하기 위해 분만을 담당한 의료기관이 지방자치단체에 아동 출생 사실을 통보하도록 한 제도다. 여야는 6월 30일 출생통보제 도입을 담은 가족관계등록법 개정안을 본회의에서 통과시키기로 했다.

늦게나마 출생통보제가 도입되는 것은 다행이지만 의문이 남는다. 유엔 아동권리위원회가 부모의 조건이나 출생여건과 관계없는 ‘보편적 출생등록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한국에 권고한 것이 2011년이다. 이때를 기준으로 잡아도 출생통보제 도입까지 10여년의 세월이 걸렸다. 수원 영아 냉장고 유기사건이 드러난 후 여야의 출생통보제 도입 합의에 걸린 시간은 일주일. 여야 이견 없이 빠른 도입이 가능했는데도, 왜 한국사회는 출생통보제를 위해 오랜 세월을 돌아와야만 했을까.

■ 왜 진작 하지 못했나

출생통보제는 사실 20년 전 도입될 수도 있었다. 보건복지부가 2000년 출생통보제와 유사한 제도 도입을 검토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뤄진 용역연구의 제목은 ‘출생 및 영유아 신고체계 개발-출생 및 사망 전산신고체계’. 의료기관이 전산시스템을 통해 영아의 출생·사망을 자동 신고하도록 하면, 제대로 된 영아사망률 통계를 만들 수 있고 100%에 가까운 출생신고를 달성해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연구는 그러나 출생통보제 도입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유가 뭘까. 2008년 호적제도가 사라지고 가족관계등록법이 제정됐지만, “정작 출생신고 제도는 병원 분만이 일반화되기 전인 구 호적시대의 제도 프레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송효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출생신고제도의 개선방안’, 2017년, 가족법연구).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2011년 9월,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한국의 출생신고 제도가 ‘보편적 출생등록 제도’가 아니라는 지적과 함께 개선을 권고했다(3·4차 국가보고서 심의). ‘아동권리협약 제7조(표 참조)에 따라 부모의 법적 지위 또는 출신에 관계없이 모든 아동의 출생이 신고되도록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한다’는 내용이다. 정부와 국회는 그러나 뚜렷한 입법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유엔 아동권리협약 7조

유엔 아동권리협약 7조

이후 2016년 미혼모들에게 돈을 주고 아이를 넘겨받은 뒤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출생신고를 한 ‘논산 영아매매’ 사건이 발생했다. 의료기관의 출생증명서 없이 성인 2명을 보증인으로 세우는 것으로도 출생신고가 가능했던 제도가 그해 폐지됐다. 아울러 검사나 지자체장이 ‘행정상 존재하지 않는’ 아동에 대해 직권으로 출생신고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도 이때 생겼다. 11~17세 자녀들을 행정상 미등록인 채로 양육해온 부모 사례 등이 확인되면서 신설된 조항이다. 하지만 이런 수준의 개정만으로는 ‘미등록’ 아동을 찾아내 보호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잇따르며 출생통보제 도입 촉구가 이어졌다. 정부·국회를 움직이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나마 2019년 정부가 보편적 출생등록을 위한 첫걸음을 뗐다. 그해 5월 정부는 ‘포용국가 아동정책’을 발표하며 처음으로 출생통보제 도입 계획을 밝혔다. 그러나 입법예고(법무부·2021년 6월)를 거쳐 정부안 발의(국무회의 통과 2022년 3월)까지 3년 가까이 걸렸다. 이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넘겨진 이 개정안은 1년 3개월간 여야 논의 테이블에도 오르지 못했다.

‘보편적 출생신고 네트워크’ 활동을 해온 김희진 아동인권 전문 변호사는 “수년간 의원실을 설득해 출생통보제 발의까지는 이끌어냈음에도 이후 진전이 없었던 이유는 발의한 의원실조차 (해당 법안에) 힘을 실어주지 않을 정도로 의원들 관심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라면서 “사실 2019년 5월 정부가 출생통보제 도입을 발표한 것도 같은해 9월 유엔 아동권리위원회 심의를 앞두고 뭐라도 보여주려고 한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아동인권이 정부와 국회의 관심을 받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출생통보제 도입 과정이 보여준 셈이다.

■ 도입될 출생통보제는 아직 ‘반쪽’

‘미등록 아동’을 방치했던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출생통보제 도입 외에도 과제가 적지 않다. 일단 여야가 합의한 출생통보제로는 미등록 이주민의 자녀가 배제되는 점을 해결해야 한다. 김희진 변호사는 “가족관계등록법으로 내·외국인의 자녀 모두가 출생통보제 대상이 되길 바랐지만, 한국에선 가족관계등록부가 국적부 역할을 하는 측면이 있어 (이주 아동 출생등록을 위해선) 어쩔 수 없이 별도 법률 통과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권인숙·소병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미등록 이주민의 자녀도 출생등록을 할 근거를 마련하고, 미등록 이주민들이 자녀 출생등록을 이유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한 상태다. 국내 체류 중인 19세 이하 미등록 이주 아동은 5000여명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앞으로 치열하게 논쟁해야 할 사안도 있다. 익명출산제(보호출산제) 도입 여부다. 정부와 여당은 임산부가 신원을 숨기더라도 의료기관에서 출산이 가능하도록 하는 익명출산제(김미애 국민의힘 의원 ‘보호출산 특별법’ 발의)를 이번에 함께 도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법안에 따르면 익명출산으로 태어난 아동은 지자체장에게 인도되고, 지자체장이 출생신고를 하게 된다. 친부모가 원치 않을 경우 아동은 성인이 된 뒤에도 친부모의 인적사항을 알 수 없다. 출생통보제가 도입되면 신원 노출을 꺼리는 임산부가 ‘병원 밖’ 출산을 시도할 테니, 친부모를 익명화하더라도 ‘출생등록 사각지대’는 방지하자는 취지다.

하지만 오랫동안 출생통보제 등의 도입을 위해 노력해온 보편적 출생신고 네트워크와 야당에선 이 제도가 ‘부모의 양육 포기’를 유도할 수 있는 데다 아동의 ‘친부모 알권리’를 침해한다고 본다. 김진 공익사단법인 ‘두루’ 변호사는 “여러 이유로 위기에 놓인 임산부가 출산을 선택한다면, 최대한 양육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최우선이어야지, 아동을 포기하도록 하는 제도가 대책일 순 없다”면서 “유엔의 권고엔 자신의 뿌리, 즉 ‘생물학적 부모’를 알권리도 포함돼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야는 일단 6월 30일 출산통보제 법안을 통과시킨 뒤, 익명출산제 도입 여부는 7월에 추가 논의키로 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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