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남지 않는 노랫말

2013.08.30 21:37
임진모 | 대중음악평론가

대중가요에서 작사와 작곡 중 어느 쪽 하기가 더 힘들까. 곡을 쓰는 사람들에게 물으면 상당수는 가사 짓기가 더 어렵다고 고백한다. ‘그때 그 사람’과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등 다수의 트로트 명작을 자작한 심수봉은 언젠가 “선율은 상대적으로 쉽게 써냈는데 적합한 노랫말이 안 나와 완성을 못한 곡이 부지기수”라고 작사의 고통을 호소한 적이 있다. 흔히 음악가를 평가할 때 작사보다 작곡을 비교우위에 놓는 경향이 있지만 쥐어짜내는 처절한 어려움은 사실 작사 쪽이다.

‘광화문연가’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붉은 노을’ 등 이문세의 무수한 히트곡을 주조해낸 고 이영훈은 ‘하루에 커피 40잔을 마시고 담배 네 갑을 피우며’ 곡을 썼다고 한다. 그의 팝 발라드가 이전 가요와 구별된 가장 큰 차이는 바로 가사였다. 생전에 그는 한숨을 지으며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가사 쓰기가 선율 만들어내는 것보다 한 50배는 어려워요. 멜로디는 못 써도 하루에 다섯 곡을 쓰지만 가사는 한 달에 하나를 쓰기가 벅차고 ‘슬픈 사랑의 노래’처럼 10년 만에 하나 나온 경우도 있습니다. 가사 때문에라도 곡을 조금밖에 쓸 수가 없었죠.” 흐르는 강물을 관조하며 낭만적인 가사를 한번 쓰려고 한강 둔치에 나갔던 1990년대 어느 음반 프로듀서의 일화가 있다. 그는 하나만 제대로 써도 초대형 대박인 노랫말의 파괴력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단 한 줄도 못 쓴 채 맥주 빈 캔과 숙취만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의 참담한 경험담을 그냥 웃어넘길 일은 아니다.

[임진모칼럼]가슴에 남지 않는 노랫말

우리는 대중가요의 리듬과 멜로디에 빨려들어가지만 오랫동안 가슴에 남겨두는 것은 공감하는 노랫말이다. 이 때문에 세월을 관통하는 긴 생명력의 노래, 즉 명곡을 목표한다면 무엇보다 가사를 잘 써야 한다. 그렇다면 요즘 일주일이 멀다하고 음원차트 1위곡이 바뀌는 어지러운 인기 급변의 행태는 ‘가슴에 남지 않는’ 가사와도 관련이 있다는 얘기가 된다. 단지 아이돌 댄스곡이라서 그런 건 아닌 것이다.

댄스음악이라도 얼마든지 깊고 진중한 노랫말은 가능하다.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CCR) 하면 ‘프라우드 메리’ ‘헤이 투나잇’ 등 1970년대 고고시대의 명곡으로 기억되는 전설의 록밴드다. 그들의 댄스음악에 전 세계인들이 열광적으로 춤을 춰댔지만 현실을 반영한 그들의 노래는 지금도 전파를 탄다. 리더 존 포거티는 “우리 음악은 먼저 사람들로 하여금 일어나 춤을 추게 하고, 그 뒤 가사를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고 말한 바 있다. 신나서 마구 몸을 흔들다가 나중에 노랫말에 공감하게 되면 그 곡은 쉬 망각의 늪에 빠지지 않는다.

근래 단숨에 주목받은 ‘크레용팝’의 노래 ‘빠빠빠’는 ‘날따라 해/ 엄마도 파파도 같이 고 빠빠빠빠 빠빠빠빠/ … 점핑 예 점핑 예 에브리바디 점핑 예 점핑 다같이 뛰어 뛰어…’가 가사의 거의 전부다. 아이돌의 대세라는 ‘엑소(EXO)’의 히트곡 ‘으르렁’은 ‘그녀 곁에서 모두 다 물러나/ 이젠 조금씩 사나워진다/ … 나 으르렁 으르렁 으르렁 대 너 물러서지 않으면 다쳐도 몰라…’ 하는 노랫말로 되어 있다.

근래의 후크송 트렌드 속에서 가사쓰기에 애를 먹는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의성과 말장난에 기대는 패턴의 가사를 주 고객인 10대들이라도 장기간 기억에 담아둘지 심히 의심스럽다. 우리의 주류가요가 감동 아닌 감각에, 저장 아닌 소비로 쏠려가고 있음의 명백한 증거다. 키드들에게 어필하고 순간 재미와 재롱을 피우면 그만이지, 오래 기억될 노래 만들기는 솔직히 뒷전인 것이다. 이것은 아이돌 댄스가 떠받치고 있는 글로벌 K팝의 미래에도 달갑지 않은 현실이다.

장르 다양성 확보도 시급하지만 그 못지않게 정제된 가사를 써내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당장은 글로벌 팬들의 포용이라는 선물을 받고 있지만 이 상태가 오래가면 배제라는 불행이 닥칠지 모른다. 포용과 배제는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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