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요릿집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중국식당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화려한 외식을 상징했다. 마치 당대에 프랑스요리가 그런 것처럼, 외국의 신기한 요리는 도입될 때마다 우리의 시선은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짜장면이 대중화되기까지 중국요리는 어쩌다 한번 특별한 날이라야 만날 수 있는 고급 식탁이었다. 한국의 중국집에 채소 요리가 드문 것도 이런 역사를 반영한다. 기왕 청요리를 즐기는 마당에 흔한 채소 대신 고기를 시켜야 마땅했다. 특히 기름이 귀하던 시절, 센 불에 기름 넉넉히 둘러 튀기고 지지는 중국요리는 우리 혀가 최초로 맛보는 혁명이었다. 기름이라고는 감자나 무 조각에 살짝 발라 아껴가며 번철에 두르던 우리 식습관에서 튀김은 언감생심이었던 것이다.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130년 중국요리의 진화

며칠 전에 언론사에서 일하는 후배와 쓸쓸한 시국의 소주 한 잔을 나누었다. 침통한 술이 몇 순배 돌고 나서야 나는 그 식당을 둘러볼 수 있었다. 재미있게도 짜장면과 짬뽕은 팔지 않는 중국 본토식이었다. 신선로를 닮은 냄비에 매운 육수가 설설 끓고 있었고, 양고기를 육수에 흔들어 익혀 먹었다. 이른바 빨래를 흔들 듯 익힌다고 해서 쇄육( 肉·쇄는 빨래를 물에 헹구는 모양을 상징)이라고 부르는 요리였다. 직원들이 모두 중국 본토인이라는 것도 특이했다. 이미 가리봉동과 대림동 일대, 건대입구 조양시장 쪽은 본토요리를 파는 하나의 거대한 중국음식타운으로 변한 지 오래다. 한동안 중국동포 중심이었으나 이제는 한족들도 많다. 대학교 앞에서는 유학 온 중국 학생들을 위해 중국식당과 중국식품점이 성행한다. 고대 앞에서 중국국수 한 봉지를 사는데, 주인이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본토인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많은 중국인들이 조선땅으로 들어왔다. 근대 건축물을 잘 다루는 기술자와 단순노무자, 외교 관련 인사들이 주를 이루었다. 점차 그들이 먹을 음식을 파는 간이식당과 호떡집이 늘었고, 이내 고급요릿집도 인천과 서울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게 주한 화교요리의 역사다. 바로 민족의 음식으로 변한 짜장면이 전해지고 정착한 기나긴 세월의 시작이었다. 역사는 ‘스파크’가 발생하면서 하나의 거대한 스펙터클한 그림을 만들어낸다. 주인공은 미국산 밀가루였다. 한국전쟁 후 미국의 원조로 밀가루가 싸게 공급되기 시작했다. 쫄깃하고 맛있는 국수를 파는 중국집에 사람들이 몰려갔다. 여기에다 당국의 쌀 소비 억제책이 오랫동안 진행됐다. 국수 먹으면 애국이요, 쌀밥 먹으면 비애국이라는 등식이 있던 시절이었다.

역사는 돌고 돌아 다시 ‘진짜’ 중국음식의 시대가 오는 것 같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가리봉동의 양꼬치집에 앉아 있으면 본토인과 중국동포들의 묘한 시선을 받았다. 이젠 중국인 타운에 가도 한국인 손님들이 더 많고 아예 한국인을 겨냥한 집들이 일반 지역에서 많이 생겨나고 있다. 근대 중화요리 역사의 기점을 임오군란 시기로 잡는다면, 130여년 만에 새로운 세기가 열리고 있는 셈이다. 몇 해 전만 해도 우리가 오리지널 훠궈(火鍋)와 양러우촨(羊肉串)을 일상의 음식으로 즐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추천기사

기사 읽으면 전시회 초대권을 드려요!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