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선생님께

2016.02.14 20:36 입력 2016.02.14 20:42 수정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지난 5일자 한겨레에 쓰신 ‘영남패권주의와 민주주의의 퇴행’이라는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논지에 십분 공감하면서, 영남패권주의(영패)에 대해 제가 지닌 생각을 약간 다른 각도에서 덧붙이고자 합니다.

[고종석의 편지] 홍세화 선생님께

한국에서 영패의 고착은 세 단계를 거쳤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에서의 영남 패권 확립입니다. 두 정권의 이양기에 광주학살이라는 비극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해야겠습니다. 그것이 영패의 폭력성과 무관치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노태우 정권 시절의 3당합당입니다. 이것은 유권자들이 짜놓은 정치지형을 정치엘리트들이 인위적으로 뒤바꿔 호남을 고립시킨 사건입니다. 전통적으로 리버럴 세력권이었던 부산·경남(PK)이 3당합당을 통해 대구·경북(TK)과 합체해 수구화했습니다. 셋째는, 사람들이 흔히 놓치고 있는 계기인데, 노무현 정권의 민주당 분당과 열린우리당 창당 그리고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시도입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노무현 정권은 영패의 완화에 이바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무리한 셈입니다. 이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주관적 선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객관적 사실입니다. 민주당 분당에 이은 한나라당과의 연정 시도를 통해 노무현 정권은 한국의 영패를 디폴트값으로 만들었습니다. 보기에 따라선 앞의 두 단계에 견줘 세 번째 단계가 더 비판받을 수도 있습니다. 노무현 정권은 영패의 공고화를 위해 호남 유권자들의 압도적 지지를 악용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두 번째 단계까지의 영패만을 언급하셨습니다. 그것은 선생님이 영패의 정치적 구현체를 새누리당으로 제한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납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선생님의 글에 반발한 것은 전통적 새누리당 지지자들이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문재인 의원 지지자들이었지요. 선생님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문재인 의원을 영남패권주의자라 지적하지 않았는데도 소위 친노 세력이 ‘영남패권주의’라는 말 자체에 심하게 반발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저는 2002년에 쓴 ‘신분제로서의 지역주의-극우 멘털리티의 한국적 작동양상’이라는 글에서 TK를 정점으로 한 한국의 지역주의 질서가 일종의 신분제이고, 영남의 패권적 지역주의가 극우 이데올로기임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영남패권주의가 인종주의적 성격, 더 나아가 파시즘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글은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위한 일종의 선전글을 겸하고 있었고, 그래서 선생님의 한겨레 기고문과 마찬가지로 TK-새누리 계열의 패권주의를 겨누는 데서 멈췄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글은 노무현 후보와 그 둘레세력에 대한 제 호감과 믿음이 얼마나 순진했던 것인가를 드러냈습니다. 저는 노무현 후보가 집권 이후 영패에 투항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고종석의 편지] 홍세화 선생님께

튀니지 출신의 유대인 작가 알베르 메미가 정의한 인종주의, 즉 “어떤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현실적인 또는 상상적인 차이들을, 공격자에게는 유리하고 피해자에게는 불리하도록 결정적으로 일반화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호남을 포함한 다른 지역 사람들에 대한 영남사람들의 지역주의, 곧 영남패권주의에도 고스란히 적용됩니다. 다시 말해 대다수 논자들이 영호남 지역주의라고 부르는, 그러나 마땅히 영남패권주의라 불려야 할 이 이데올로기는 인종주의입니다. 사실 호남지역주의라는 말에도 어폐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월하다고 가정되는 인종이 뒤처진다고 가정되는 인종에게 갖는 태도와 감정을 인종주의(racism)라고 부릅니다. 예컨대 유럽계 미국인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갖는 차별 정서를 인종주의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발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유럽계 미국인에게 갖는 정당한 분노와 저항을 인종주의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남성이 여성에게 갖는 우월적 지위와 태도를 성차별주의(sexism)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반발로 여성이 남성에 대해 수행하는 저항운동을 성차별주의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인종주의든 성차별주의든 적극적 가치를 체현하고 있다고 가정되는 집단이 소극적 가치를 체현하고 있다고 가정되는 집단을 대하는 패권적 태도를 가리킬 뿐, 그 거꾸로는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남과 호남(을 포함한 다른 지역들)의 관계에서, 그들 사이에 어떤 적대적 감정과 태도가 있다고 할 때, 지역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영남의 지역주의뿐입니다. 인종주의가 백인우월주의이고, 성차별주의가 남성우월주의이듯, 한국의 지역주의는 영남우월주의, 곧 영남패권주의인 것입니다.

제가 영패를 극우 이데올로기라고 부른 것은 그것이 고결하고 순수한 피에 대한 집착이고, 거기서 비롯된 배제의 욕망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피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영패는 극우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지역은 곧장 피로 환원됩니다. 그것이 상상된 혈연이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호남사람과 영남사람의 결혼은 다소 별나게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 결혼이 결렬됐을 때, 그것은 주로 ‘전라도 핏줄’ ‘전라도 씨’에 대한 경상도 쪽 부모들의 거부감 때문에 생기는 결과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압니다.

영패는 전형적 극우 이데올로기인 파시즘과 많은 특징을 나눠 지녔습니다. 우선 영패는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늘 편견에 노출돼 있습니다. 영남사람이 지녔다고 선전되는 긍정적 특질들과 호남사람이 지녔다고 선전되는 바로 그만큼의 부정적 특질들은, 독일 제3제국의 권력자들이 소위 아리안족에게 자의적으로 부여한 수많은 긍정적 특질들, 그리고 유대인에게 들씌운 수많은 부정적 특질들과 대칭을 이룹니다. 영패는 영남사람과 다른 지역 주민집단 사이의 평등을, 곧 인간의 평등을 인정하는 데 인색합니다. 거기서 자연스럽게 지도자 원리가 도출됩니다. 이 원리에 따르면, 사람들 사이에는 그리고 집단들 사이에는 지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우열의 차이가 있으므로 지도해야 할 사람이나 집단, 지도받아야 할 사람이나 집단은 정해져 있습니다. 한국에서 지도해야 할 지역집단은 영남입니다. 그 영남을 정점으로 한 지역적-인종적 위계질서의 맨 아래에 호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김대중 정권에 대한 영남사람들의 정서가 과도하게 적대적이었던 것은 바로 이 ‘자연적’ 위계질서를 그것이 뒤집어놓았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독일 제3제국에서 유대인이 집권한 것입니다!

영패는 영남의 정치엘리트들이 바탕을 마련한 것이지만, 그것은 이내 거의 모든 영남사람들에게 파고들었습니다. 영남은 한국의 지역-인종 카스트에서 맨 윗자리를 차지하게 됐습니다. 지금 심리적으로 고귀한 신분이 돼 있는 영남사람 대부분이 (다른 지역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19세기 말 노예의 후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얄궂은 일입니다. 그러나 전통적 신분제가 무너지고 역사의 변덕에 힘입어 영남이 정치적·경제적 최고권력자들의 분만실이 되자, 영남인들은 내적으로 융화돼 집단적으로 고귀한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상상된 신분질서 속에서 자족감을 누리며 다른 지역에 물리적 패권을 행사합니다. 요컨대 영패는 인종주의이자 파시즘입니다. 그리고 이 영남파시즘을 실천하는 주체는 새누리당만이 아니라 노무현 정권 이래의 민주당 계열 정당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호남에 기생하는 영남파시스트입니다. 한국은 아직 민주주의 이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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