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의 늪

2016.05.16 21:04 입력 2016.05.16 21:14 수정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2012년 어린이날, 고래가 그랬어는 경향신문과 함께 ‘아이를 살리는 7가지 약속’이라는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그중 4번 항목은 ‘아이와 노동자가 행복해야 좋은 세상입니다’였다. 아이들의 미래와 관련하여 분명한 것 하나는 대부분 노동자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생산직이든 사무직이든,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그래서 노동자의 현실은 아이의 미래다. 아이의 얼굴에 웃음이 있는 사회는 노동자가 살 만한 사회이기도 하다. 노동자의 삶이 불안정한데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이 있는 사회는 없다.

[김규항의 혁명은 안단테로]우울의 늪

그러나 그 항목은 경향신문 지면에 실릴 때 ‘남의 아이 행복이 내 아이 행복이다’라는 다소 모호한 말로 바뀌었다. 아이들 관련 캠페인에 노동자가 들어갈 때 독자의 거부감이 예상된다는 이유에서 수정 요청이 있었다. 조·중·동이 아닌 경향 독자가 그렇다는 건 매우 애석한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운동은 실재하는 현실에서 출발하는 것이라 수용했다. 그리고 이번 어린이날 즈음, 노동 교육과 아이들의 왜곡된 노동 의식 등을 주제로 한 경향신문 기사와 카드뉴스가 인터넷에서 널리 공유되는 걸 본다. 4년 동안 우리는 적어도 그만큼은 나아간 것이다.

박근혜 정권이, 아니 박근혜라는 사람이 주는 고통은 확실히 특별한 데가 있다. 그가 독재자의 자질 면에서 제 아버지 못지않다는 건 이미 확인된 바다. 아버지가 죽고 한국 사회가 정치적 민주화의 길로 접어든 지 수십 년임을 고려한다면, 아버지보다 훨씬 더한 사람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소리를 해도 괜찮을까. 박정희 때 이런 소리를 했다면 당장 잡혀가거나 간첩으로 몰렸을 텐데 말이다. 박근혜에게 박정희와 다른 무엇이 있는 건가. 아니다. 박정희도 박근혜도 제 욕하는 사람 잡아가고 싶은 건 마찬가지인데, 박정희는 했지만 박근혜는 못하는 것이다. 박정희와 박근혜의 차이가 아니라 박정희 시절 인민과 박근혜 시절 인민의 차이다.

지난 총선이 남긴 가장 큰 의미는 여소야대가 아니라 그것이다. 여야가 이념과 정책의 차이가 없는데 여소야대가 그리 큰 의미가 있겠는가(19대 국회가 며칠 안 남은 이 순간도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새누리당이 추진하던 최악의 의료영리화법에 합의했다). 지난 총선이 남긴 가장 큰 의미는 하한선,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인민의 하한선을 확인한 것이다. 선거 직전만 해도 곧 영구집권으로 간다느니, 박근혜의 지지율을 들며 어리석은 국민들이니 뭐니, 지식인 나부랭이들이 어지간히 호들갑을 떨지 않았던가. 인민은 단 한나절에 그런 호들갑을 잠재웠다.

1998년 박노해씨가 출소하여 한창 말을 많이 하고 다닐 때 그랬다. ‘김대중 정부의 개혁이 성공하지 못하면 한국은 87년 이전으로 돌아간다.’ 어리석은 소리였다. 87년 이전으로 돌아가려면 87년 이전의 인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98년의 인민은 87년 이전의 인민과 달랐다. 그런데 심지어 2016년의 인민 앞에서 영구집권 운운이라니. 인민은 좀처럼 쉽게 변화하지 않지만, 한번 만들어진 하한선 역시 좀처럼 쉽게 무너트리지 않는다.

[김규항의 혁명은 안단테로]우울의 늪

만일 우리가 87년 이전에 살았다면, 박근혜가 주는 고통은 훨씬 적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개탄하고 분개하는 상황들 중 상당 부분은 별문제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가 완벽할 순 없는 거지.’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서양처럼 민주주의를 할 순 없지.’ 넘어갔을 것이다. 개탄하고 분개할 일들이 그 시절보다 훨씬 많아져서 더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 훨씬 많이 개탄하고 분개할 수 있게 되어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사회적 상황에 대한 다양한 감정은 해당하는 사회의식을 통해서만 생겨난다. 별다른 학습이나 계몽 없이 인간이라면 본디 느끼는 거라 여겨지는 것들조차도 다 그렇다.

그렇다면 깨어 고통스러운 게 나은가, 잠들어 평온한 게 나은가. 사실 우리는 깨어 느끼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종종 모순된 태도를 보인다. 깨어 있는 주체들의 사회를 지향하면서도, 덜 깨어 있다는 게 공동체적 평온과 높은 행복도의 주요한 이유인 사회(전적이진 않지만, 부탄 같은)를 상찬하며 ‘오염된’(혹은 계몽된) 나를 탄식한다. 심지어 근대성의 폐해에 집착한 나머지 전근대 소농 공동체를 이상적인 사회 모델처럼 말하는 경우도 있다. 여성은 기본적 인권이 없었고, 공동체란 그저 가부장의 독재 체제였다는 사실은 온데간데없다.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모두 중산층 인텔리 남성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저런 부정의 정서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지금 여기가 ‘더 나쁜 적이 없었던 사회’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사회’라 믿게 한다. 부정의 정서는 사회 비판에 효율성을 주고, 사회를 비판하는 나에게 한결 정당한 기분을 갖게 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선을 넘어서면 걷잡을 수 없는 우울의 늪에 빠져들게 된다. 절망적인 현실을 희망적으로만 보는 건 현실에 눈감는 일이다. 그러나 존재하는, 확보한 희망을 절망의 필터로 덮어버리는 건 더욱 그렇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절망은 절망으로 희망은 희망으로 봐야 한다. 우울의 늪에서 우리는 그런 분별을 잃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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