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오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2016.06.10 21:16 입력 2016.06.10 21:34 수정
이문재 시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이상한 주인이었다. 이른 아침 일꾼들이 다 왔는데도 포도밭 주인은 오후에 장터로 나가 빈둥거리는 사람들에게 포도밭으로 가서 일을 하라고 권유했다. 저녁나절, 주인은 자신의 포도밭으로 가서 관리인에게 당부했다.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처음에 온 사람과 똑같이 일당을 지불하라고. 그러자 이른 아침부터 온종일 땀흘려 일한 사람들이 불만을 표시했다.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밭 이야기의 한 대목이다.

[사유와 성찰]‘나중에 오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나는 위 기사를 마주할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곤 했다. 독실한 신자였다면 포도밭 주인의 파격을 기독교 고유의 거룩한 나눔의 정신이라고 이해하고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돈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속도시의 한 구성원이어서 저 ‘평등한 분배’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경쟁력, 효율성, 성과주의로 대표되는 생산력 제일주의에 길들여진 경제적 인간이라면 포도밭 주인의 행태는 선뜻 수긍하기 어려울 것이다.

저 포도밭 이야기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게 열려 있다. 후일담이 상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 가지 질문이 뒤따른다. 이를테면 그날 귀갓길에서 일꾼들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을까. 두어 시간 일하고 하루 품삯을 받은 사람은 기뻐했을까. 종일 일하고도 나중에 온 사람과 동일한 일당을 받은 사람의 발걸음은 어떠했을까. 관리인은 주인의 처사에 흔쾌히 동의했을까. 다음날 장터에서는 또 어떤 이야기가 번져나갔을까. 다른 포도밭 주인들은 이상한 포도밭에 대해 험담을 하지는 않았을까.

관점을 이동하면 질문은 더 이어진다. 장터에 나오지 않은(못한) 사람들, 가령 집 안에 누워 있는 병자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 아이를 돌봐야 하는 아낙네들은? 장터에 나가 일자리를 구할 사람조차 없는 가족은? 한동안 잊고 있던 이런 질문이 다시 고개를 든 것은 최근 세계적 이슈로 떠오른 기본소득 때문이다. 지난주 스위스 국민들이 기본소득 도입에 반대했다는 뉴스가 성서의 포도밭 주인과 일꾼들을 떠올리게 했다.

우리에게 기본소득은 아직 낯선 개념이다. 지난 총선 때 녹색당, 정의당 등 소수 정당이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기본소득은 여전히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런데 스위스에서 국민 1인당 월 300만원을 지급하자는 정책을 놓고 국민투표에 들어간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기본소득에 대한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스위스 국민들은 부결시켰지만 이번 투표는 적잖은 의미를 가진다. 기본소득을 ‘인류의 의제’로 격상시킨 것이다.

경제 성장이 전부라는 인식론적 자물쇠를 풀기만 하면 분배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인류의 ‘오래된 미래’를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포도밭 주인 이전에도 ‘대단한 도전’이 있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안식년 제도가 그것이다. 안식일과 안식년, 희년(禧年)은 단순한 휴식 제도가 아니었다. 지주와 소작인, 주인과 노예 사이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해방의 기획이었다.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지난 세기, 다른 나라도 아니고 미국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적극 전개된 적이 있다. 1969년 닉슨이 가구당 연간 1600달러를 지원하는 정책안을 제출했고, 1972년 대통령 선거 때는 맥거번 후보가 국민 1인당 1000달러의 소득을 보장하겠다는 공약을 내놓기도 했다. 21세기 들어서는 독일, 그리스, 이탈리아의 군소 정당들이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내세워 득표율을 크게 높였다. 국내에서 일부 운영되고 있는 무상급식, 기초연금, 반값등록금도 기본소득과 크게 다르지 않다(<녹색평론> 2013년 7·8월호 좌담 참조).

기본소득이 필요한 이유는 자명하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기계가 인간을 대신하고, 세계경제는 고용 없는 성장을 구가하고 있다.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고, 일자리다운 일자리를 만들어내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지구는 더워지고 에너지와 자원은 고갈되고 있다. 이 같은 복합위기 앞에서 인간은 갈수록 왜소해지고 있다. 존엄과 자유, 평등과 상생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스위스가 재점화한 분배에 대한 쟁점이 지금과 다른 미래의 문을 여는 몇 안되는 열쇠일지 모른다.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정치와 경제는 물론 국가, 시장, 인간, 생명, 지구를 전면적으로 재정의하게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 세기 전, 근대경제학을 ‘악마의 경제학’이라고 비판하면서 ‘인간의 경제학’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한 존 러스킨은 앞에 소개한 포도밭 이야기의 한 구절을 자신의 책 제목으로 삼았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 훗날 간디, 톨스토이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저 책의 제목은 분명 예수의 말씀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저 복음에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나중에 오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포도밭으로 간 사람들보다 훨씬 많을지도 모를 그들에게도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들과 똑같은 일당을 줘야 한다. 그래야 지금, 여기가 포도밭으로 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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