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자의 몸은 누구의 것인가

2016.10.02 21:10 입력 2016.10.02 21:39 수정
정희진 | 여성학 강사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다리 위에서 수면까지의 거리는 70미터다. 이곳에서 떨어졌을 때 생존 확률은 1%, 통념과 달리 익사는 극소수고 대부분은 몸이 수면에 부딪쳤을 때의 마찰 강도로 인해 사망한다고 한다. 척추가 절단될 정도의 힘이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좋은 것은 물처럼 부드럽다는 말도 있지만 물의 힘은 생각보다 세다. 쓰나미, 해일 등 재해를 상기하지 않더라도 물고문, 고수압 호스 등 물은 유서 깊은 무기다.

[정희진의 낯선 사이]망자의 몸은 누구의 것인가

물로 만든 총기, 이른바 ‘물대포’는 물의 마찰력을 극대화한 병기다. 물대포를 “얼굴 정면에 집중적으로” 맞고 쓰러진 백남기씨가 317일 동안의 사투 끝에 사망했다. 예상대로 경찰과 유가족, 시민들은 그의 시신을 놓고 갈등 중이다. 이번에 검경은 ‘조건부 부검 영장’이라는 간접(?) 시신 탈취를 시도하고 있다. 사망 원인을 물대포가 아니라 ‘질병사’로 적는다고 해서, 경찰의 잘못과 의도가 면책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는 시민도 없다.

시신 탈취. 공권력에 의한 사망 사건이 발생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상황이다. 원인 조작과 책임 회피 외에 국가가 시신을 소유하려는 이유가 있을까. 국가의 시신 탈취는 개인의 몸과 사회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국민은 평등하지 않다. 평소 국가가 무연고자, 노숙인, 신원 미상의 시신에도 이 정도로 관심이 많았던가. 개인의 몸도, 국가도 중립적이지 않다.

국가는 국민을 선택적으로 다룬다. 생사여탈을 결정하든가 그냥 내버려 둔다. 국가는 자기 이해에 따라 국민을 적으로 대한다. 이번 사건 초기에도 엉뚱한 논란이 있었다. 국가와 일부 매스컴은 백남기씨가 농민(민중)이냐, 대학을 나온 농민운동가(지식인)냐를 놓고 피해를 저울질했다. 평소에는 농민을 무시하더니, 농민이면 순수한 참가자고 농민운동가면 불순 세력인가.

시신 탈취는 고인에 대한 예의와 함께 인간의 몸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한다. 죽은 자의 몸은 누구의 것인가? 산 자의 몸은 그 사람의 것이자 그 사람 자체다. 그런데 사람이, 내가, 그녀가, 그가 없어졌다. 살아있던 몸(social body)의 당사자는 사라졌지만, 서서히 사라질 몸(body)만 남은 상태. 움직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없는 물질도 아니다.

인간은 자연에서 왔다. 다시 그곳으로 간다. 결국 죽은 사람의 몸은 자연의 것이다. 몸은 자연이 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지구(planet earth)는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죽은 몸의 소유권은 자연에 있지만 망자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여정은 가족과 지역사회, 국가 등 인간이 만든 제도의 도움 혹은 훼방을 받는다. 우리가 흙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정치와 권력, 사회·문화적 관습이 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다양하다. 대부분의 현대 사회에서 망자의 시신은 일차적으로 가족에게 소유와 관리의 책임이 있다. 망자가 가는 길은 만만치 않다. 가족 구성원이 죽었을 때 드러나는 가족 간의 불화에서 보듯 가족 제도 자체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한평생을 파트너로, 간병인으로 함께한 동성애의 경우 장례식장에 참석하지도 못하거나, 인연을 끊었던 ‘가족’이 갑자기 등장해 재산 분쟁을 하는 경우가 대표적일 것이다.

가장 문제는 국가다. 국가에 산 자, 죽은 몸은 모두 임의적인 대상일 뿐이다. 시위 현장에서 사망한 경찰은 국가가 ‘공동체를 위한 죽음’으로 인정해, 보상과 공식적인 예우를 갖춘다. 근본적인 문제는 국민의 몸을 국가의 소유라고 보는 발상이다. 범죄와 관련하여 사법 절차에 있는 사람과 국가의 관계도 일시적인 것이지, 영원하지 않다. 수인의 몸도 국가의 소유는 아니다. ‘부검 영장’이라니, 이는 자신이 살해한 국민과 그 가족에 대한 최악의 국가폭력이다.

국가의 국민 신병 소유권 주장이 곧 죽음임을 뜻하는 대표적인 제도는 고문과 사형제다. 나는 사형제에 반대하는데, 이유는 다른 이들과 조금 다르다. 고문과 사형제의 본질은 죄질과 그 처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의인화해, ‘좋은 사람(국가)’이 ‘나쁜 사람’을 맘대로 할 수 있음을 합리화하는 제도다.

실체로서의 국가는 없다. 전체 국민의 이해를 대변하는 공동체는 없기 때문이다. 통치자가 국가의 이름으로 자기 권력을 행사할 뿐인데, 우리 현대사에는 유독 그런 이들이 많았다.

국가 권력 대리인의 파렴치함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살인 경찰은 피해자의 시신에 대해 어떤 종류의 결정권도 가질 수 없다. 사전적 의미에서 공권력이 합법적인 폭력이긴 하나, 지금 박근혜 정부가 과연 ‘국가권력’인지도 의문이거니와 폭력은 최소화가 원칙이다. 한겨울에 노인에게 물대포를 쏘아 쓰러뜨리고 사망에 이르게 한 경찰의 행위는 공권력 행사가 아니라 대국민 전쟁 선포다.

그들을 비난하기 전에 살아있음이 부끄럽고 각자도생의 삶뿐이니, 두려움이 앞선다. 우리는 언제까지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살아야 할까. 지금 정부는 선하고 치열하게 살았던 한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을 막고 있다. 모든 사람은 죽어서 자연이라는 다른 ‘집’으로 귀향한다. 그 길이 온전했으면 한다. 한(恨) 없이 가족과 지인, 사랑하던 이들이 함께하는 여정이어야 한다. 삶의 대부분 시간은 애도와 그리움으로 채워져 있다. 이것이 인생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경찰과 대치하면서 흔들리는 관 속에 있다면, 나는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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