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칫국부터 마신 중소기업계

2017.08.07 20:54 입력 2017.08.07 22:56 수정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뒤 중소기업계는 살짝 들떠 있었다. 당선이 확정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난 한 관계자는 “대통령의 첫 공식 외부행사는 우리 중기업계와의 만남이 될 것”이라며 “업계 숙원 사업들이 이제 탄력을 받게 됐다”고 기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이제부터 (정부) 파트너는 중소기업이 될 차례”라고 말하기도 했다.

[기자칼럼]김칫국부터 마신 중소기업계

그도 그럴 것이 후보자 시절 문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소기업 역할론을 설파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성장과 일자리 창출 과정에서 중소기업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경제 패러다임을 중소기업 중심으로 바꿔 놓겠다고 공언했고, 대한민국을 ‘중소기업 천국’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석 달 가까이 지난 지금 정부와 중소기업계, 이 양측의 분위기가 묘하다. 최저임금 인상과 법정 근로시간 단축 등 정부가 추진 중인 노동 정책의 대척점에 항상 중소기업계가 서 있다.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15조원이 넘는 인건비 부담이 추가로 발생할 것이라는 자료를 내놨다가 ‘과대 추산’ 논란을 일으켰던 곳도 바로 중소기업계였다. 급기야 중소기업계와 국정기획자문위의 상견례 자리에서 “중소기업 다 죽는다”는 볼멘소리가 터져나왔고, 자문위 측에서 “마치 경총(사용자단체 경영자총연합)에 온 것 같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험한 꼴이 연출되기도 했다.

중소기업계는 대통령의 취임 후 첫 외부 일정의 공식 파트너가 자신들이 되기를 기대했다. 나아가 정책 자금도 좀 넉넉하게 지원받고, 전담 부처 신설로 발언권도 확실히 챙길 수 있을 거라 판단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대통령이 첫 번째로 찾은 곳은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좋은 일자리,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를 선언했다.

이쯤에서 중소기업계는 한 번쯤 자문해봤어야 한다. 왜 자신들이 첫 번째가 아니었는지, 또 대통령의 이 행보가 무엇을 뜻하는지 말이다. 대통령이 줄곧 표방해 온 친 중소기업 정부는 단순히 규제를 풀고 대기업을 견제, 중소기업들이 승승장구하고 채용이 늘어나는 그림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중소기업 천국’의 최종 목표가 그냥 일자리가 아닌 ‘좋은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소기업계는 틈날 때마다 대한민국 고용의 88%를 중소기업계가 책임지고 있다고 자랑해왔다. 좋게 말하면 일자리 창출의 주역이지만, 바꿔 말하면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기 위한 문제와 숙제의 88%도 중소기업계에 있다는 얘기다. 이쯤되면 지금 중소기업계가 기대하고 있는 당근보다 훨씬 더 많은 채찍이 앞으로 쏟아질 것이라는 계산이 어렵지 않게 나온다. 손놓고 있을 때가 아니라 하도급 관행, 노동 여건 개선 등 ‘좋은 일자리 정책’발(發) 태풍이 몰아치기 전 스스로 손봐야 할 구멍들이 수없이 많다.

정부의 메시지는 간결하고 분명하다. ‘재벌 저격수’라고 소문났던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소상공인, 중소기업계와 만난 자리에서 “하도급법 위반의 79%는 중소사업자”라고 포문을 연 이유가 뭘까? ‘을의 갑질’을 눈여겨보고 있으니 어서 빨리 개선에 착수하라는 분명한 메시지다.

중소기업 대통령이 되겠다던 대통령으로부터 중소기업계와 한번 만나보자는 메시지가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 부처 장관이 임명되지 않았고, 북한이 미사일을 쏘고, 댈 수 있는 이유야 수없이 많다. 하지만 ‘국정농단’ 파문에 연루돼 고개를 숙였던 대기업들은 벌써 대통령과 만났다. 이를 위해 대통령은 휴가를 앞두고 간담회 일정까지 앞당겼다. ‘작은 재계’ 코스프레로 정부와 각을 세우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 좋은 일자리를 위해 중소기업계가 진짜 무엇을 하고 또 할 수 있을지 보여주지 못하고, 계속 머뭇대다보면 언제 또 변방으로 밀려날지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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