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이상헌 ILO고용정책국장- 최저임금은 나를 위해 추운데서 일하는 이에게 ‘스웨터’를 입혀주는 것

2018.02.06 06:00 입력 2018.04.04 16:20 수정

새해에 최저임금이 16.4% 올랐다. 시급 7530원. 수요일마다 집에 오시는 가사노동자를 떠올렸다. 혹시 최저임금도 못 드리는 건 아닐까. 계산해봤다. 시급으로 1만원 이상 드리고 있었다. 안도했다.

내가 하는 노동의 성과를 계산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매달 25일 회사 인트라넷에 찍히는 급여액에는 만족하지 못했다. 잠깐이지만 사용자 입장이 돼보니 달랐다. 당장 타인의 노동과 임금을 저울질했다. 누구나 자신의 노동은 귀하게 여긴다. 반면 타인의 노동에 대해선 까다롭게 따진다.

국제노동기구(ILO)가 주창하는 ‘소득주도성장’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이상헌 박사(51)에게 최저임금에 대해 물었다. ILO에서 17년간 근무해온 이 박사는 지난달 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국장(고용정책국장)에 올랐다. 고용정책국장은 회원국의 고용정책, 노동시장정책, 청년고용 등 분야에서 정책자문과 협력사업 수행 등을 담당하는 ILO의 핵심 요직이다. 스위스 제네바에 머물고 있는 이 박사에게 페이스북 메시지로 다짜고짜 인터뷰 요청을 했다. 겸손하고 친절한 답변이 돌아왔다. 인터뷰는 주로 e메일로 이뤄졌고, 전화 통화와 페이스북 메시지 교환으로 보충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경제개혁이 다소 더디면서 최저임금 논쟁에 과부하가 걸리는 상황을 염려했다.

일자리 위협 없이 소득 올리고
후유증은 다른 정책으로 풀어야


■최저임금은 전체 노동자들의 삶에 어떤 의미인가.

“스웨터(sweater)의 예를 자주 든다. 스웨터는 추위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옷이지만 ‘땀(sweat)을 짜내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다. 산업화 초기, 스웨터 같은 옷을 대량생산하기 위해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노동자들의 땀을 짜낸 사람들을 가리킨다. 우리를 위해 스웨터를 만들려고 그늘지고 추운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그들을 위한 스웨터’를 입혀주는 게 최저임금이다. 최저임금은 시장경제에 도입된 인권적 장치다.”

■최저임금 인상에서 최우선이 돼야 할 원칙은 무엇인가.

“저임금 노동자의 일자리에 큰 위협이 없으면서 임금이 실질적으로 오르는 것이 중요하다. 저임금 노동층의 총노동소득(총고용×평균임금) 증가 여부가 관건이다. 논쟁이 과열되면, 최저임금이 경제를 망친다거나 물가인상의 주범이라는 주장으로 연결되곤 한다. 그런 일이 생기지도 않겠지만, 생긴다 해도 그건 최저임금의 책임이 아니다. 최저임금은 저임금 노동자의 후생 증가를 위한 정책도구다. 예기치 않은 후유증이 생긴다면 다른 정책으로 해결해야 한다. 도로 안전을 위해 설비 투자를 했는데,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들어 나랏돈이 좀 더 필요해졌다고 치자. 비용을 이유로 안전설비 공사 일부를 하지 말자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최저임금이 올라봐야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에게 돌아갈 몫은 거의 없고, 몫이 있다 해도 선순환 구조가 형성되기까지는 너무 오래 걸린다’는 게 논쟁의 초점 같다.

“쟁점은 임금 증가의 경제적 순기능이 아니라, 경제적 이익이 어떻게 분배되는가 하는, 분배 문제다. ‘임금 증가로 소비 구매력이 커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 혜택은 대기업이나 소수에 집중될 것’이란 염려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이것이 최저임금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경제개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끌어와 최저임금 무용론을 주장하는 일은 이치에 맞지 않다. 최저임금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듯 모든 문제의 원인도 아니다. 지금 최저임금 보완책으로 나오는 임대료, 수수료 정책은 ‘보완’책이 아니라 중요한 경제정책이다. 이런 정책들이 앞서야 한다.”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이 지난해 11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웹 서밋’에서 강연하고 있다. 이 국장은 “최저임금 인상으로 후유증이 생긴다면 다른 정책으로 해결해야 한다”며 “도로 안전을 위해 설비 투자를 했는데, 나랏돈이 생각보다 더 든다고 치자. 비용을 이유로 일부 공사를 하지 말자는 사람은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이상헌 박사 제공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이 지난해 11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웹 서밋’에서 강연하고 있다. 이 국장은 “최저임금 인상으로 후유증이 생긴다면 다른 정책으로 해결해야 한다”며 “도로 안전을 위해 설비 투자를 했는데, 나랏돈이 생각보다 더 든다고 치자. 비용을 이유로 일부 공사를 하지 말자는 사람은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이상헌 박사 제공

보수언론은 1월 내내 최저임금 인상을 비판했다. 중앙일보 사설 제목을 보자. “최저임금 인상의 역풍…‘1만원 공약’부터 내려놓아야”(9일자), “임대료 탓은 그만…최저임금 속도 조절로 푸는 게 정석”(10일자), “두더지잡기식 최저임금 미봉책, 뿌리부터 바로잡아야”(17일자), “현실과 이상의 괴리만 확인시킨 최저임금 정책”(22일자). 흥미로운 것은 이들 사설의 결론이 거의 같다는 점이다. “최저임금 1만원 공약부터 포기해야 한다. 지역별·업종별로 최저임금을 손질하고 상여금·숙식비 등 산입 범위도 확대해야 할 것이다”(9일자), “인상 속도를 조절하는 게 근본 처방이다”(10일자), “3년 내 1만원 달성은 속도를 조절하고 상여금 등을 최저임금에 산입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지역별·업종별 차등화도 필요하다”(17일자), “해법은 나와 있다. 상여금·수당을 최저임금 산입범위에 포함시키고, 3년 내 54.5%에 달하는 인상 속도를 늦추는 것이다”(22일자). 재계 요구인 △3년 내 1만원 공약 포기 △지역별·업종별 최저임금 차등화 △상여금·수당 최저임금 산입을 되풀이하고 있다.

대기업 등 인상 반대 주장은
임금인상 요구 분출 우려 탓


■대기업과 보수언론은 최저임금 인상을 왜 이토록 반대하나.

“최저임금에는 전반적 임금상승을 견인하는 효과가 있다. 한국에서 최저임금을 빼면, 대기업이나 공공부문 노조에 속하지 않은 노동자는 임금을 올릴 수 있는 방식이 사실상 없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다른 노동자들도 임금 인상을 요구할 수 있는 ‘협상 지렛대’ 효과가 생긴다. 아마 이런 전체적 임금 인상 효과를 염려할 것이다. 중요한 논쟁지점이다.”

■최저임금 인상 이후 경비·청소노동자 해고 등이 잇따르고 있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일자리 감소는 불가피한가.

“실증연구를 보면 최저임금의 고용감소 효과는 없거나 미미하다. 경비·청소노동자의 경우 고용축소가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인건비 증가 때문인지, 누적된 다른 요인들이 이를 ‘기회’ 삼아 드러난 것인지 알기 어렵다. 다만 실증연구도 ‘월급 올려달라면 자르면 되지’라는 직관적 감성 앞에서는 별 힘을 못 쓴다는 게 문제다. 실증연구도 사실 부족하다. 국내 연구가 부족해 상이한 노동시장 제도에 기반한 해외 연구만 원용하는 것도 아쉽다”

가뭄에 채소값 올라도 사먹듯
고용주와 소비자가 분담해야


■외식업을 중심으로 일부 물가도 오르고 있다.

“저임금 노동자에 의존하는 업종에선 어느 정도 물가가 오르는 일이 불가피하다. 이는 고용주와 소비자가 나눠 분담하는 게 정상이다. 가뭄으로 농산물 가격이 오르면 소비자들이 좀 투덜대면서도 구매하지, 따지지는 않는다. 최저임금 인상을 내 주머니에서 돈을 뺏어가는 것처럼 생각해선 곤란하다.”

■정부는 1인당 13만원의 일자리안정자금을 지원키로 했다. 그러나 1월 신청한 노동자 수는 고용노동부 추산 대상의 3.4%에 그쳤다. 4대보험 가입에 부담을 느낀다는 사업주가 많다.

“저임금 노동자의 어려움은 임금도 문제이지만, 사회적 보호망 결여와도 관련돼 있다. 4대보험의 사각지대를 없애는 건 필수불가결한 과제다. 당장 돈이 드는 일이니까, 기업뿐 아니라 노동자도 반대할 수 있다. 하지만 장기간의 전체적 소득안정성을 위해선 4대보험 가입이 필요하다. 정부와 사회가 꾸준히 설득해야 할 사안이다.”

■자영업자들은 건물주의 임대료 폭리, 프랜차이즈 가맹본사의 갑질 등에 대한 적극적 규제도 요구한다.

“당연히 필요하다. 이런 정책이 선행돼야 최저임금 인상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끌고 갈 수 있었는데, 현실은 그 반대로 진행됐다. 사정이 있기는 했다. 지난해 5월 들어선 정부가 가장 먼저 맞닥뜨린 현안이 6월 결정되는 최저임금이었고, 최저임금 1만원이라는 공약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앞서가야 할 정책이 뒤따르고, 뒤따라야 할 정책이 앞서게 됐다. 이해는 되지만 아쉬운 부분이다.”

한국에서 분배가 어려운 건
기업 간 분배의 불평등 때문
중소기업 숨통 틔워 해결을


■정부가 최저임금 갈등을 영세 자영업자 대 저임금 노동자라는 ‘을 대 을’의 싸움이 되도록 방치했다는 지적도 있다. 대기업이나 프랜차이즈 본사 등 ‘갑’에는 인상으로 인한 부담이 미미하다는 주장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경제개혁 없는 노동시장 개혁은 쉽지 않다. 고용은 여러가지 경기적·구조적 변수에 따라 결정된다. 큰 덩어리는 거기서 정해진다. 최저임금 등 노동시장 제도가 그 덩어리를 약간 늘리거나 줄일 수는 있다. 하지만 주어진 한계 내에서다. 잔뜩 줄어든 덩어리를 주고 나서, 최저임금 같은 문제를 두고 다투게 된다. 열심히 싸우다보면, 왜 애당초 덩어리가 작았는지 잊어버린다. 최저임금만 너무 열심히 뛰면 안된다. 다른 정책이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이 박사는 평소 소득주도성장론에 대해 설명하며 “일자리 창출 전략과 별개로 움직이면 성공하기 어렵다”고 말해왔다. 그에 따르면, 소득주도성장에서 ‘소득’은 절대소득이 아니라 ‘소득 분배’다. 분배에는 기업 사이, 기업과 노동 사이, 노동 사이 등 세 가지 층위가 있다. 한국에서 노동 사이의 분배, 또는 기업과 노동 사이 분배가 어려워지는 이유는 기업 간 분배가 악화되기 때문이다. 대기업은 시장지배력을 기초로 단가 삭감을 통해 중소기업으로부터 소득을 이전해간다. 이는 통계상으로 중소기업의 생산성 하락, 대기업의 생산성 상승으로 나타난다. 그는 이를 두고 “약탈이 생산으로 둔갑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한국에서 임금 인상 여지는 충분하지만, 이를 위해선 중소기업의 숨통을 틔워 분배를 개선하는 정책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2020년까지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올리는 일이 가능한가.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체계적이고 촘촘한 전략의 문제다. 물론 전반적 경제상황이 향후 2~3년간 우호적일 것이란 가정 아래서다.”

■재계에선 지역별·업종별 최저임금 차등화를 주장한다.

“지역별 차등화는 인도네시아나 중국처럼 물가·소득에서 지역 격차가 큰 나라에 효과적이다. 한국은 그렇지 않다. 지역별 차이를 두고 싶다면, 최저임금 위에 지역별로 그보다 더 높은 생활임금을 도입하면 된다. 일부 지자체에서 이미 시행중인 걸로 안다. 업종별 최저임금 역시 실현 가능성이 없다. 한국은 업종별 임금이 체계적으로 정립돼 있지 않고, 이를 결정하는 제도적·정책적 틀도 없는 상황이다.”

한국의 노동소득분배율(국민소득 중 노동자가 가져가는 비율)은 2015년 63.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1개국 중 23위였다. 중위임금의 3분의 2도 받지 못하는 저임금 노동자 비율은 23.5%(2016년 기준)로 미국에 이어 두번째다. 한국노동연구원의 한국노동패널조사 결과를 보면, 최저임금의 95% 이하를 받는 노동자 가운데 76.5%는 생계를 책임지는 가구주나 그 배우자다(한겨레 1월31일자 보도). 최저임금 노동자라고 무조건 ‘알바’가 아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국회의원 급여를 최저시급으로 책정해주세요’란 청원이 올라 있다. 청원자는 “최저시급 인상 반대하던 의원들부터 최저시급으로 책정해달라”고 적었다. 마감을 9일 남긴 5일 오후 현재 11만4000여명이 동의를 표시했다. 진행 중인 청원 가운데 추천수 4위다. 진짜 여론은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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