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미투 두 달, 그리고 언론- “피해자가 신원 공개했다고 언론이 신상털기할 권리 생긴 건 아니다”

2018.03.26 18:17 입력 2020.09.09 17:15 수정

22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운동이 개최한  ‘2018분 동안의 이어말하기’ 행사에 참여한 여성들이 청계광장 주변에 설치된 미투 게시판에 걸린 글들을 읽어보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22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운동이 개최한 ‘2018분 동안의 이어말하기’ 행사에 참여한 여성들이 청계광장 주변에 설치된 미투 게시판에 걸린 글들을 읽어보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 “회색빛 컨테이너의 크기는 20㎡ 남짓. 방 한 칸과 화장실로 이뤄졌다. 안(희정) 전 지사는 밤에 술을 마셔야 잠을 청할 수 있을 만큼 괴로워한다고 한다” “구속 가능성에 대비해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속죄의 시간을 가지려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소박한 식단으로 하루 한두 끼 정도 먹었다. 매 끼니 밥을 반 공기도 먹지 않았다” “(숙소 주인인 대학 동창) A씨에게 ‘아이고 내가 이렇게까지 돼 버렸다, 친구야’라고 말하기도 했다”(동아일보 3월20일자 <“내가 이렇게까지…” 친구에 토로, 부인-아들과 열흘 칩거>).

이 기사의 인터넷판에는 [단독]이라는 접두어가 붙어 있다. 바이라인(기자 이름을 적은 줄)에는 이름이 세 명이나 등장한다. 성폭행 혐의를 받고 있는 가해자의 ‘은신처 생활’이 이 정도 보도가치가 있는지 의문이다. 취재 의도는 알 수 없지만, 결과는 가해자 미화·옹호일 뿐이다.

# 안 전 지사 비서 김지은씨가 JTBC에 출연해 안 전 지사의 성폭행을 고발한 후 김씨 모습을 활용한 보도가 쏟아져 나왔다.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 모니터링 보고서를 보면, KBS·MBC·SBS·JTBC·TV조선·채널A·MBN 등 7개 방송사에서 과거 김씨가 안 전 지사를 수행하던 영상을 ‘발굴’해 내보냈다. 일부 방송사는 동그라미 표시나 밝기 조절 등을 통해 김씨 모습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김언경 민언련 사무처장은 “미투 운동이 시작된 후 언론이 피해자 보호를 두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다. 피해자 본인이 신원을 공개했다고, 언론에 신상털기를 할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 조선일보 디지털편집국은 3월4일 명지전문대 성폭력 피해자들의 진술서를 입수했다며 온라인 기사를 내보냈다. 역시 [단독]을 달았다. 피해자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진술서 공개에 동의한 바 없으며 해당 보도가 ‘2차 가해’라고 반발했다. 한국기자협회의 성폭력 사건 보도 가이드라인은 ‘언론은 경쟁적인 취재나 보도 과정에서 피해자나 가족에게 심각한 2차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언론은 피해자의 피해 상태를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묘사함에 있어, 피해자 사생활의 비밀이 침해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지난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한국여성대회’에 참석한 한 시민이 ‘미투(#Me Too·나도 고발한다)’가 적힌 머리띠를 착용하고 있다. 정지윤기자

지난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한국여성대회’에 참석한 한 시민이 ‘미투(#Me Too·나도 고발한다)’가 적힌 머리띠를 착용하고 있다. 정지윤기자

서지현 검사의 ‘안태근 성추행’ 폭로로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이 본격화한 지 두 달이다. 언론은 미투 운동의 확산 과정에서 심대한 역할을 했다. “새로운 사회적 물결을 이룰 만큼 이 운동이 대중적 지지와 관심을 받을 수 있었던 데 언론의 기여가 적지 않았다”(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 성명)는 평가가 나온다. 반면 “미디어가 지나치게 판단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힘을 과신하지 말고 윤리적으로 조금 더 예민해져야 한다”(이희은 조선대 교수·한국방송학회 토론회)는 비판도 적지 않다.

·사건 당사자 양쪽 얘기 객관적 전달, 언론서 저널리즘 원칙 따랐지만

·피해자 고통 이해와 공감 없으면 결과적으로 가해자에 유리할 뿐

성폭력 피해 당사자들은 언론 보도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STX 성희롱사건 고발자 ‘실비아’(가명)씨와 지난 24일 전화 통화를 했다. 그는 피해자 중심의 정책 제안과 지원을 위해 ‘전국미투생존자연대’ 발족을 준비하고 있다.

- 미투 운동 보도에 대한 평가를 해달라.

“김지은씨 인터뷰를 본 날, 잠을 못 이뤘다. JTBC와 손석희 앵커는 신뢰받는 방송사이고 언론인이다. 김씨를 꼭 출연시키지 않고도 사전 검증 과정을 거쳐 ‘안희정 성폭행’을 보도하는 길이 있지 않았을까. 저는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로서 사건과 일상이 분리되길 바란다. 제가 원하는 정체성은 ‘앞으로도 일할 수 있는 사람, 일 잘하는 사람’이다. 궁극적인 피해 회복은 그런 직업인으로 평가받는 건데, 사건과 신상이 속속들이 공개되면 복귀가 어려워진다. 언론이 피해자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도 보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면 한다.”

- 언론에 바라는 점이 더 있다면.

“관점이 있는 기사를 써달라. 충격적 사실이나 워딩(발언)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충분히 설명해줄 필요가 있다. 성폭력 사건은 예민하다는 이유로 판단이나 논평을 붙이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되면 모호한 영역이 많아지며 대중의 억측으로 이어진다. 언론이 용어도 정확하게 써야 한다. 조민기씨가 숨진 뒤 ‘조씨가 미투 가해자 의혹을 받아왔다’는 유의 기사가 나왔다. 성폭력 의혹을 받아왔다고 하면 되는데, 불편했다. 미투 운동이 과열돼서 (조씨가) 피해를 입은 듯한 인상을 줬다.”

지난 23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연극배우 김모씨를 만났다. 그는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마련한 ‘2018분(33시간 38분) 이어 말하기’ 행사에서 동료 배우의 성추행을 증언하고 난 참이었다. 김씨는 미투 관련 기사를 관심있게 보아왔다면서 “특정 이슈에 대한 기사를 일일이 찾아보는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 언론에는 꾸준한 보도를 주문했다. “방송계에 있는 분한테 들은 얘기다. 장자연 사건 이후 그쪽 분위기가 잠시 긴장했지만 결과적으로 달라진 게 없다고 하더라. 몇 달 지난 뒤 ‘미투, 그런 일이 있었어?’ 하는 사태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 회원 109명은 최근 ‘미투 운동 보도에 대한 성찰과 변화를 촉구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학자들은 △피해자 인권 보호와 2차 피해 방지 노력 △젠더폭력의 구조적 원인에 대한 이해에 기초한 취재·보도 △언론의 남성 중심적 조직문화 성찰과 성평등 교육기구 운영 등을 촉구했다. 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동후 인천대 교수는 “성폭력 사건 보도 가이드라인과 구체적 실천요강이 잘 갖춰져 있다. 문제는 추상적으로 기자들의 머릿속에만 머물러 있는 점이다. 언론사 차원에서 성찰과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성차별을 공고화하는 ‘펜스 룰’(여성과의 접촉 자체를 회피하는 행태)이 ‘미투 때문에’ 생긴 것처럼 보도하는 사례를 들며 “잘못된 맥락화”라고 꼬집었다.

·언론이 미투 확산 기여한 건 사실

·가해자 옹호, 사생활 침해엔 불편

·학계, 2차 피해방지 노력 등 촉구

성명 초안을 작성한 김수아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와 25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 미투 운동 보도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 있나.

“일회적 사건성 보도에 머물지 않고 연속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미투 운동) 이전보다 늘어났다. 여성 문제에 천착해온 일부 신문사들은 가해자를 괴물화하는 게 아니라 구조적 차별의 문제로 짚어보려고 했다.”

- 문제 보도 유형은 어떤 것들인가.

“포털에서 클릭수가 많이 나오도록 온라인 뉴스 제목을 선정적으로 뽑는 경향이 여전하다. ‘미투 가해자’ ‘미투 때문에 몰락’ 같은 표현도 눈에 띄었다. 미투에서 ‘미(Me)’가 드러나야, 실명이 공개돼야 의미가 있다는 식으로 논의가 전개된 것도 유감스럽다. 일부에선 피해자 의사에 반해 비공개 진술서를 입수해 보도하는 식의 구태도 나타났다.”

- 언론이 최우선시해야 할 부분은.

“피해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태도가 절실하다. 보도하는 사람은 양쪽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전달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기울어진 운동장’의 문제가 발생한다. 가해자가 현실의 성차별 구조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언론은 저널리즘 원칙을 따른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가해자에게 유리해질 수 있다. 이 점에 유의해야 한다.”

윤여진 언론인권센터 상임이사는 “언론이 미투 운동을 적극적으로 취재하고 보도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여전히 언론의 시각에 가부장적, 남성적 관점이 숨어 있을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언론환경이 경쟁적이라는 이유도 변명이 될 수는 없다. 미투 운동은 피해자들이 그들의 인생을 걸고 온 힘을 다해 목소리를 내는 일 아닌가”라고 말했다.

“새로운 여성해방운동의 실천 중에서 최초로 전국 신문의 1면에 실리게 된 운동은 미스아메리카대회 반대 운동이었다. 그 이전에도 일자리, 동일임금, 남녀공학을 위한 많은 페미니즘의 행진이 있었지만, 미디어는 관심을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이 행사에 그렇게 많은 언론의 관심이 쏠린 이유는 간단했다. 몇몇 여성이 빵빵한 브래지어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기 때문이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저널리스트 수전 팔루디가 1991년 출간한 페미니즘의 고전 <백래시> 4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미디어의 선정주의에 대한 통렬한 질타는 27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미투 운동은 전복적 사건이다. 전복적 사건을 보도하는 태도 역시 달라져야 한다. 돌아보고 뒤집어보고 성찰해야 한다. 그래야 본질과 구조가 보일 것이다. 겸손하고 예민하고 세심해야 한다. 그럴 때 피해자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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