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성폭력 가해자들 향한 외침 - 이젠 장벽을 부술 때…“우리는 몇몇 괴물이 아닌 구조를 바꾼다”

2018.02.26 22:32 입력 2018.04.04 16:20 수정

한국여성민우회 주최로 지난 23일 서울 신촌에서 열린 미투 운동 지지 집회에서 한 참석자가 ‘우리의 분노가 세상을 바꾼다’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한국여성민우회 주최로 지난 23일 서울 신촌에서 열린 미투 운동 지지 집회에서 한 참석자가 ‘우리의 분노가 세상을 바꾼다’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안태근 전 검사장이 26일 검찰에 출석했다. 서지현 검사가 안 전 검사장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지 28일 만이다. 서 검사의 용기 있는 고발 이후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은 숨가쁘게 전개됐다. 특히 문화예술계로 확산된 후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시인 고은, 연극 연출가 이윤택·오태석, 인간문화재 하용부, 배우 조민기·조재현·한명구, 사진가 배병우, 뮤지컬 연출가 윤호진 등의 사례가 드러났다. 종교계(가톨릭 사제)와 언론계(KBS 기자)의 성폭력도 폭로됐다.

발화(發話)는 시작됐다. 이제는 장벽을 부술 때다. 지난 23일 한국여성민우회 주최로 열린 ‘미투 운동 지지 자유발언대회’와 25일 열린 ‘연극·뮤지컬관객 위드유(#WithYou·당신과 함께한다) 집회’에서 나온 구호들을 중심으로 미투 한 달을 짚어본다.

■ “더 이상 괴물들이 두렵지 않다”

“외교통상부 청사 10층의 남자화장실이 여자화장실로 바뀐다고 한다. ‘우먼 파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여성의 사회 진출은 숫자로만 따질 일이 아니다. 여성들이 맡은 업무의 비중이나 실제 이루어낸 많은 성과들은 성 역할의 중심축이 이동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중략) 여성법조인이 늘어나다 보니 새로운 풍속도 생겼다. 대부분 회식의 대미를 장식했던 폭탄주는 와인이나 에스프레소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중략) 여성에 대한 배려는 비단 회식 등 일상생활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아직은 소수이고 약자인 여성 법조인이 미래 한국의 법원, 검찰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열린 마음으로 ‘유리천장’을 거두는 용기와 배려가 더욱 필요하다.”(법률신문 ‘월요법창-외통부 남자화장실 실종사건’)

이 칼럼의 필자는 안태근 당시 법무부 정책기획단장이다. 글이 실린 것은 2011년 7월18일. 성추행 사건(2010년 10월)으로부터 9개월 후다. 갑자기 개과천선이라도 한 걸까. 그럴 리 없다. 동료 검사의 상가에서, 법무부 장관이 보는 가운데 여성 검사를 성추행한 이가 안태근이고 ‘여성 법조인들을 위해 유리천장을 거둬주자’는 글을 기고한 이도 안태근이다.

이윤택은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의 각본을 썼다. 강제로 키스한 남성의 혀를 깨물어 절단했다는 이유로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배우 조민기·조재현은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다정한 ‘딸바보’의 면모를 과시했다. 남수단에서 선교봉사하던 신자에게 성폭행을 시도한 수원교구 한모 신부는 고 이태석 신부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에 소개될 만큼 존경받는 사제였다.

괴물은 없다. 가해자는 악마가 아니다. 문제는 권력을 남용·악용하는 구조다.

연출가 이윤택, 연출가 오태석, 시인 고은, 배우 조민기, 배우 조재현(왼쪽부터)

연출가 이윤택, 연출가 오태석, 시인 고은, 배우 조민기, 배우 조재현(왼쪽부터)

■ “너희들이 한 일은 사소하지 않다”

‘I 파멸 U(나는 너를 파멸시킬 것이다).’ 손팻말에 적힌 메시지는 선명했다. 23일 저녁 서울 신촌 유플렉스 앞에서 열린 공개발언 대회. 삼삼오오 모여든 젊은 여성들은 분노를 담은 손팻말을 들었다. ‘가해자에게 치욕을, 증언자에게 명예를’ ‘죄인은 오라를 받아라’ ‘우리는 몇몇 괴물이 아닌 구조를 바꾼다’ ‘여자를 함부로 만져도 되는 세상을 끝내자’ ‘여성은 자원이 아니며 영감의 원천도 아니다’ ‘수치심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것이어야’ ‘가해자 처벌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달라’ ‘눈 감지 말고 탄식만 말고 #MeToo’ ‘너의 시대는 끝났다. Times up’….

차례로 발언에 나선 여성들은 직간접적으로 겪은 성폭력 사례를 증언하고, 피해자들과의 연대를 표명했다.

흥미로웠던 것은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활동가의 발언이었다. 그는 “요즘 상담소에 가장 많이 전화를 걸어오는 이들이 누구일 것 같으냐”고 물었다. 답은 의외였다. “가해자들이다. 전화해서 자기방어를 한다. ‘예전에 성폭력을 저지른 것 같은데, 옛날 일이라 법적 책임을 지지는 못하겠고 여성민우회에서 교육을 시켜달라’고 한다.” 피해자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도 있는 성폭력을 교육 몇 시간 받으면 넘어갈 수 있는 사소한 일탈로 여긴다는 방증이다.

지난 25일 오후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 위드유 집회. 연극·뮤지컬을 좋아하는 관객 500여명은 성폭력 가해자들을 향해 외쳤다. “범죄자는 자숙 말고 자수하라.”

■ “당신들은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예술이라니?”

이윤택의 성폭력이 오랫동안 은폐될 수 있었던 데는 연희단거리패 일부 단원들의 동조·방관·묵인이 있었다. 한 여성 단원은 “안마를 거부했더니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가) 쟁반으로 가슴팍을 밀치면서 ‘어쩌면 이렇게 이기적이냐. 빨리 들어가라’고 강요했다”고 말했다. 선교봉사 중 신부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 신자는 “다음날 거기 있던 다른 후배 신부님들한테 피해 사실을 알렸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고 증언했다. 영국 정치사상가 에드먼드 버크는 “악의 승리에 필요한 유일한 조건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동조·방관·묵인한 이도 범죄자다.

■ “명예는 가해자의 것이 아니다”

국내 형법은 거짓뿐 아니라 사실 적시에 따른 명예훼손죄도 인정한다. 2016년부터 문단 내 미투 운동에 앞장섰던 탁수정씨는 “법은 여성들의 편이 아니다. 가해자들은 법이 자신들에게 우호적이기 때문에 법으로 걸고 넘어진다”고 말했다. 명예훼손죄나 무고죄가 사실상 가해자들의 무기가 되고 있음을 호소한 것이다.

법률가인 서지현 검사조차 JTBC 인터뷰에서 “(안태근 전 검사장이나 최교일 의원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면 위헌법률심판 소송으로 다퉈볼 생각”이라며 역고소까지 각오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인정하지 않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계속 존치할 필요가 있는가. 검경과 법원도 수사·재판 과정에서 낡은 가해자 중심주의를 버리고 피해자의 치유와 명예 회복에 초점을 두는 방향으로 변화해야 한다.

■ “이게 나라냐! (촛불은) 안 끝났다”

미투 운동에서 정부가 해야 할 최우선 과제는 피해자 보호다. 우선 신상털이 등 2차 가해를 막는 일이 시급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생존권 문제가 부각될 수밖에 없다. 피해자는 대부분 직장 내 약자이다.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비방·회유 대상이 되거나, 조리돌림을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부당한 인사처분을 받고 직장을 잃게 된다. 창원지검 통영지청이 “통상적인 절차에 따라” 휴직 중인 서지현 검사의 책상을 치우고 짐을 뺀 것은 상징적인 장면이다. 노동조합도 조직돼 있지 않은 영세사업장 노동자들, 인턴 등 비정규직의 처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교수가 ‘미래’까지 거머쥐고 있는 대학원생도 마찬가지다.

문경란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직장을 잃지 않고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고용노동부가 깊이 고민할 사안”이라고 말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각 부처에 서기관급 이상의 ‘성평등 전문관’을 둘 것을 제안했다. 이들 전문관이 여성가족부와의 유기적인 협조 아래 성차별에 기반을 둔 고용차별이나 성폭력의 문제를 조사하고 구제하는 역할을 맡도록 하자는 것이다. 안태근의 성폭력을 폭로한 검사가 후일 부장검사·검사장이 되고, 이윤택의 성폭력을 폭로한 신인 배우들이 연극계에서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국가와 사회의 역할이다.

지방선거를 100여일 앞둔 각 정당·정파에서는 미투 운동이 자신들에게 미칠 영향을 예의주시할 것이다. 미투 운동은 정치적인가. 나와 가족·이웃의 삶, 공동체의 변화를 이끌어내려 한다는 측면에서 정치적이다.

그렇다면 미투 운동은 정파적인가. 미투가 폭로하고자 하는 폭력의 장본인이 보수 인사냐, 진보 인사냐는 중요하지 않다. 한국 내 여성혐오 현상을 분석한 <여혐민국>의 저자 Yangpa(양파·본명 주한나)의 페이스북 글을 빌리자. “지금 당장 성추행당하는 여자에게, 가해자가 지난 대선에 누구 찍었는지가 중요할 거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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