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내일을 상상할 수 없는 오늘

2018.04.22 21:27 입력 2018.04.22 21:28 수정

‘소확행’이란 단어를 아시는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에서 처음 등장한 말로 작고(小) 확실하게(確) 실현 가능한 행복(幸)을 뜻하는 말이다. 그는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을 때, 서랍 안에 잘 정리된 속옷이 가득 쌓여있을 때 행복하다고 말한다.

[NGO 발언대]더 나은 내일을 상상할 수 없는 오늘

최근 친구들과 이러한 작고 분명한 행복의 순간을 나누는 일이 부쩍 늘었다. ‘너는 어디서 행복을 찾고 있니?’하고.

행복이 뭘까 하는 낭만적인 대화를 나눌 만큼 세상이 참 좋아진 걸까. 급격한 경제 성장과 산업화의 시기를 맞이하며 절대적 빈곤의 시대와는 작별을 고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삶이 빈곤하다고 느낀다. 왜일까. 빈곤이 사라진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일과 삶의 균형이 무너진 긴 노동시간과 언제 월세가 오를지 모를 불안한 자취방, 무한 경쟁 속 도태되지 않기 위해 지쳐버린 마음과 같은 또 다른 형태의 빈곤이기 때문이다.

이뿐일까, 경제적·사회적 자본을 축적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회로 진출하는 청년들은 같은 재화와 서비스라도 남들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보증금을 넉넉히 마련할 수 없으면 매달 월세를 몇만원씩 더 내고 살아야 하고 목돈이 없어 휴대전화를 일시불로 구입할 수 없다면 매달 이자를 붙여가며 할부로 갚아야 한다. 1인 가구를 위해 소분된 식재료의 단가 또한 결코 저렴하지 않다. 소득은 신통찮은데 지출은 날로 높아지는 고비용 사회에서 더 나은 내일과 미래를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른 의미에서의 풍요 속의 빈곤을 맞이한 셈이다.

그렇기에 정말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낭만적이기보다 오히려 불안한 현실을 어떻게든 극복해 보려는 몸부림에 더 가깝다. 부모 세대보다 더 많은 부의 축적을 기대하기도, 나은 생활수준을 영위하기도 어렵다는 판단 앞에서는 당장의 행복을 지키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조금은 불안하다. 이러다 우리는 더 큰 행복을 바라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더 나은 삶을 기대할 수 없다는 패배주의가 내 말초신경을 서서히 마비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 많은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일했던 과거의 청년들에 비해 현재의 청년들은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기 위해 선택하고 행동한다. 이러한 혁명적인 삶의 태도는 분명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살아가며 행복을 하나씩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장담 속에서 맞이하는 오늘이 마냥 행복할 수는 없다. 왜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을 상상할 수 없는가. 그렇기 때문에 자신만의 소확행에 몰두하다 한계에 부딪힌 청년은 결국 나를 둘러싼 세계로 향한 분노를 가지게 된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행복하려면 ‘내가 속한 세계’가 안정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청년에게는 개인의 행복을 공동체의 행복으로 치환해낼 에너지가 있다. 이때 개인은 사회와 연결되어 혁명을 불러일으킬 동료가 된다. 필요한 것은 하나, 청년과 사회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한 달 전 개봉한 영화 <소공녀>에는 자신의 취향을 지키기 위해 집을 포기한 주인공 미소가 등장한다. 기본적인 의식주 하나 챙기지 못하면서 위스키 한 잔과 담배 한 대는 꼭 피워야겠다는 그녀의 ‘염치없는 사랑’을 무엇으로 응원할 수 있을까. 작은 선언으로 글을 끝내려 한다. 이건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가지고 오늘을 위로하며, 작지만 확실한 혁명을 하나씩 일상 속에서 이루어가겠다는 맹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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