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과의 인연을 끊는다

2018.04.25 21:06 입력 2018.04.25 21:11 수정

[경제와 세상]대한항공과의 인연을 끊는다

나와 우리 가족의 대한항공과의 인연은 꽤 오래됐다. 1972년 여름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 가면서 대한항공을 타고 갔다. 초등학교 3학년 때다. 그해 4월 김포-하네다-호놀룰루-LA를 경유하는 대한항공 첫 미주 노선이 개설됐다고 한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1971년 겨울 이민 준비를 위해 처음 도미했을 때는 일본항공(JAL)을 타고 갔지만, 국적 항공기가 생긴 마당에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는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호놀룰루 공항과 LA 공항은 대한항공 B707이 도착하자 “태극 마크를 단 항공기를 본 교민들이 감격해 흘린 눈물로 공항이 눈물바다가 됐다”는 일화가 있다. 미국 이민생활 적응이 쉽지 않아 1년 반 만에 가족 모두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대한항공은 유학이나 출장을 떠나는 나의 날개가 돼주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대한항공 46년 고객이다. 온 국민의 스트레스 지수를 높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 조씨 집안 자녀들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나는 대한항공 고객이었다.

이제부터 나는 대한항공을 타지 않기로 한다. 그동안 쓰고 남은 마일리지 10만2494도 포기한다. 대한항공이 다른 항공사들보다 국내발 취항 노선이 다양함을 잘 알고 있다. 나로서는 출장 때마다 충분히 답답할 것이다. 이 모든 불편보다 대한항공 표를 예약할 때마다 떠오를 ‘땅콩 회항’과 ‘물컵 갑질’의 천박함이 주는 분노가 훨씬 크다. 훌륭한 승무원 서비스, 편리한 AVOD(주문형 비디오·오디오 시스템), 맛있는 비빔밥이 주는 편익보다 한진 왕국에서 일하는 작업자와 직원에게 저들이 퍼부은 고성과 욕설로 인한 간접 고통의 비용이 훨씬 크다. 개인 차원에서 대한항공 포기 결정은 합리적이다.

이것이 대한항공 오너와 이사회를 향해 반세기 가까운 고객인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이자 압박이다. 올여름 오스트리아에서 학술회의가 있는데 바로 적용할 생각이다. 앞으로 함께 출장 가는 사람들에게도 기회 있을 때마다 다른 항공사 비행기를 타자고 말할 거다. 물론 지금까지 보여준 조양호 회장 가족의 행태로 볼 때 일개 교수의 고객 이탈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 고객 외면→수익률 저하→투자자 외면→위기 도래→개과천선→지배구조 개혁의 나비효과가 발생할지.

대한항공이 어떤 회사인가. 적자에 허덕이던 국영 대한항공공사를 한진 창업자가 인수하면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항공사가 됐다. 국민은 태극 문양의 자국 비행기를 타며 자부심을 느꼈고, 정부는 국적기 보호와 국제경쟁력을 명분으로 항공기 구입 시 취득세 면제 등 각종 혜택을 부여했다. 지금은 어떤가. 가장 성공적인 민영화 사례의 하나로 꼽혔던 대한항공은 온데간데없고, 세습자본주의와 ‘갑질자본주의’의 어두운 모습만 남아 있다.

미국의 경제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은 “악명 높은 대한항공 자매가 사퇴했다”며 한국발 기사를 연이어 싣고 있다. 회장 가족의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인한 국가 브랜드 하락, 기업가치 추락, 반기업 정서 가중, 국민 자괴감으로 인한 생산성 저하, 직원들의 신체적·정신적 고통. 대한항공은 이 총체적인 사회적 비용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 것인가. 대한항공 홈페이지에 가면 초기화면에 ‘녹색경영’ ‘사회공헌활동’ 메뉴가 보인다. 고객 입장에서 더 이상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늘날 기업 지속가능성 평가의 핵심 지표로 등장한 ‘환경, 사회, 지배구조(ESG)’ 관점에서 보면 대한항공은 낙제점이다.

상황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오너 리스크’가 법적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제기됐다. 경찰은 이들의 폭행 의혹을 수사 중이다. 사적 용도로 사용할 물품을 세관 신고 없이 들여와 밀수 및 탈세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기내면세품 판매 과정에서 오너 소유 회사에 일감 몰아주기로 부당 이익을 제공했을 가능성을 두고 공정거래위원회가 조사에 들어갔다. 대한항공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이사진 교체 등 적극적인 주주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대한항공 직원 1000여명이 채팅방을 개설해 갑질 정보를 공유하는 등 단체행동에 나서고 있다. 대한항공을 둘러싼 이해관계자의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됐다. 유의미한 결실을 이루어 우리 국민의 묵은 체증이 내려가고 대한항공이 재탄생하면 좋겠다.

100만 마일을 훌쩍 넘겨 대한항공을 이용한 내 아버지와 일가 어른을 대신하여 조양호 회장에게 한마디 한다. 집안 단속 실패는 가정사로 남겨 두시라. 수천만 국민, 수백만 고객과 투자자, 수만 직원에게 가정교육 실패의 부작용을 전가해서는 안된다. 국적기에 국격을 담기는커녕 먹칠하는 일은 그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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