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정의의 결과

2018.04.26 20:37 입력 2018.04.26 20:42 수정

[녹색세상]평화, 정의의 결과

오늘, 남북정상회담이 열립니다. 이어서 북·미 정상회담도 예정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일들이 차례로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우리를 몸서리치게 했던 전쟁의 악몽이 가시고 평화의 기운이 봄날 아지랑이처럼 피어납니다. 벌써 한반도의 평화가 남한과 북한에 미칠 영향과 변화에 대한 예측이 분분합니다. 북한은 이미 ‘핵’ 대신 경제를 선택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와 미국과 협상하기 위한 제안이자 북한의 미래 청사진일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남북, 북·미의 협상으로 만들어질 평화는 더없이 중요하지만, 이것으로 우리의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평화는 우리 사회가 또 다른 평화로 도약하는 디딤돌이어야 합니다. 전쟁의 종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의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평화의 시작이어야 합니다. 성서의 ‘샬롬’이 뜻하는 평화입니다.

정의는 무엇인가? 성서의 정의는 인간의 존엄과 평등, 자연의 존중과 보살핌으로 요약됩니다. 성서를 보면, 권력이 국가를 앞세워 정의의 요구를 부정하거나 무시할 때, 어김없이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불의의 공개와 고발, 정의의 촉구와 구현이 예언자의 일입니다. “이게 나라냐!” 광장에서 터졌던 시민들의 분노는 바로 예언자의 외침이었습니다. 그렇게 불의한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 정권을 세운 지 1년이 되어갑니다. 하지만 불의는 생각보다 훨씬 더 넓고 깊게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삶의 안녕을 파괴했던 과거의 결정과 정책은 법과 행정의 이름으로 오늘도 힘을 발휘합니다. 존엄과 평등, 존중과 보살핌이란 정의의 요구는 돈과 권력, 풍요와 편리라는 현실의 요구 앞에서 번번이 힘을 잃고 맥없이 쓰러집니다. 사람이 삶에서 쫓겨나고, 산과 강이 파헤쳐지고 바다가 메워집니다. 문제의 근원은 현실 논리에 발목을 잡혀 방치되기 일쑵니다. 사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일그러진 사회의 모습은 개인의 내면을 비춰줍니다. 정의의 요구보다 현실의 요구를 앞세우기는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다루기 가장 힘든 것은 어느새 지금의 사회 현실을 빼닮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한반도의 평화체제 정착으로 전쟁의 가능성을 종식하는 것은 우리의 오래된 간절한 소망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정의가 실현되지는 않습니다. 길게는 십년 넘게 직장에서 쫓겨나 거리를 헤매는 해고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지난 정권이 시작했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사드 배치로 인한 고통과 억울함을 아직도 그대로 겪고 있는 성주의 주민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의 호소와 절규는 역사적인 정상회담에 대한 관심과 환호에 파묻혀버립니다. 명절이 더 서러운 사람들처럼, 이들에게는 오늘이 더 아프고 서러울 수 있습니다. 정의만이 이들의 눈물을 닦아줄 것입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아름다운 봄은 겨울을 난 굳어진 땅에 꽃을 피우는 어려움 속에서 온다는 것을 표현한 시어라지만, 우리의 4월은 글자 그대로 잔인한 달입니다. 4월, 우리는 제주4·3과 세월호 참사가 반복되어서는 안된다고 다짐했습니다. 그건 바로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 다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필요한 법과 정책의 수정과 제정도 쉽지 않습니다. 법과 정책만으로 사회의 근원적 변화가 이뤄지지도 않습니다. 현실의 요구보다 정의의 요구를 기꺼이 앞세우겠다는 개인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우리 내면의 변화라는 지난한 일이 요구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4월의 아픔을 타성에 빠진 우리 자신을 깨울 죽비로 삼는다면, 흐트러질 때마다 우리를 다잡아줄 서늘한 샘으로 삼는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그때, 고통스러운 4월의 기억은 정의를 키워내는 힘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4월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돌이 된 마음’을 ‘살로 된 마음’으로 바꾸는, 잔인하지만 아름다운 4월로 변할 것입니다(<에제키엘 예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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