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마르크스, 그 사상의 거처

2018.05.06 20:42 입력 2018.05.06 20:43 수정

카를 마르크스. 그가 세상에 온 지 200년이 되었다. 한 사상가가 세상에 온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것은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이 오는 것이고, 그 눈으로 본 세상에 대한 부끄러움과 다짐이 오는 것이다. 그래서 사상은 사상가와 더불어 오지만 사상가와 더불어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사상가는 한 인간과 더불어 태어나지만 그의 죽음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 눈이 있고, 부끄러움이 있고, 다짐이 있는 한에서 말이다.

[고병권의 묵묵]카를 마르크스, 그 사상의 거처

그처럼 많은 적과 동지를 가진 사상가가 또 있을까.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이 땅에서도 그랬다. 지금은 납골당 같은 도서관 서가에 꽂혀있고 이따금씩 교양인을 위한 추천 도서로 얼굴을 내밀지만, 얼마 전까지 그의 책은 집에 모셔둔 것만으로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될 수 있었다. 그를 읽는다는 게 지성과 열의만이 아니라 용기를 필요로 하던 시절이 있었다.

젊은 날의 우리는 그를 많이 읽지 않고도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물론 공부하지 않은 채 지지자가 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최소한으로 말해도 자랑거리는 아니다. 이런 젊은이들은 마르크스 시대에도 있었다. 역사를 관통하는 영원한 법칙 따위는 없으며, 각각의 사회형태는 고유한 법칙을 갖는다는 게 역사유물론의 핵심인데도, 각각의 역사 연구는 소홀히 한 채 역사에 도통한 마르크스주의자 행세를 한 사람들 말이다. 엥겔스는 이런 젊은이들에게, 마르크스가 1870년대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내뱉은 말을 환기하곤 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내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를 많이 읽지도 않은 채 지지자가 되는 것이 꼭 치기와 허세 때문만은 아니다. 그에게는 어떤 사상가에게도 없는 특별한 매력이 있다. 그를 조금만 읽어도 정신을 확 붙잡아 끄는 것이 있다. 혁명가 레닌은 마르크스의 <자본>에 대해 “통상적인 경제서적과 달리 노동자계급에서 자본가계급을 비판한 유일한 경제서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아마도 레닌을 휘어잡은 것이 우리를 휘어잡은 것이고, 마르크스를 몇 줄 읽기도 힘들었던 프롤레타리아들을 휘어잡은 것일 터이다.

마르크스의 책은 억압받는 자들의 입장에서 쓴 귀하디귀한 책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우리 쪽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의 사상가였고 그의 책은 우리의 책이었다. 그걸 알아차리기 위해 많은 책, 많은 지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냄새가 바뀌었고 조명이 바뀌었는데 어떻게 그것을 몰라보겠는가. 그의 책에서는 다른 냄새가 났다.

요즘 나는 마르크스의 책들을 다시 떠들어보며 김남주의 시구처럼 ‘사상의 거처’에 대해 생각한다. 사상이란 보통 자리를 갖지 않는다. 올바른 사상이란 자리와 무관하게, 입장을 떠나서 말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그래야 보편적인 사상인 것이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의 노골적인 편들기는 사상의 역사, 철학의 역사에서 추문에 가깝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편들기에 떳떳했고 또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보편적인 사상이야말로 일종의 환각이며 입장과 무관한 사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마르크스는 일찌감치 자기 사상의 거처를 찾아갔다. 프로이센의 낡고 답답한 공기 아래서 자유를 갈구하던 젊은 철학도는 신기할 정도로 제 사상의 거처를 잘도 찾았다. ‘사유하는 인간’과 ‘고통받는 인간’. 마르크스는 둘을 하나로 묶고 싶어 했다. 파리의 급진적 운동가들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말을 배우기 전에도, 그는 낡은 세계를 끝낼 주체를 ‘사유하며 고통받는 인간’과 ‘억압받으며 사유하는 인간’에서 찾았다. 고통받는 자를 해방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고통받는 자로부터 해방을 얻기 위해서 그는 그쪽으로 걸었다. 억압받는 자의 편에서만 사유의 구원이 온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에게 사유란 고통의 머리이며 고통이란 사유의 심장이었다.

소위 인간주의적 철학의 시기를 벗어났다고 하는 때에도 이런 자세, 이런 편들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어떤 점에서 그의 편들기는 우리가 속한 공간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서, 다시 말해 특정한 곡률로 기울어진 우리 시대 권력과 가치의 공간에 대한 분석에서 더욱 빛났다. 마치 표면의 등식에서 공간의 굴곡을 읽어내는 물리학자처럼, 그는 상품의 자유롭고 평등한 교환을 분석함으로써 부르주아지를 편들며 부르주아지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진 공간을 읽어냈다. 노동자의 주사위가 불리한 눈만을 내놓는 이유가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이 공간의 성격임을 읽어낸 것이다.

이처럼 표면을 더듬어 공간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뛰어난 지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전에 밝은 등식의 주변을 옅게 스쳐가는 부등식의 음영을 놓치지 않는 세심한 눈이 있어야 한다. 사유하는 인간이 고통받는 인간과 함께했을 때만 얻을 수 있는 눈 말이다. 이런 눈을 가졌기에, 흔한 사상가들이 불법적 약탈과 자의적 독재에 대해 고민할 때, 그는 합법적으로 이루어지는 약탈을, 그리고 법 너머에 있는 부르주아지의 주권과 독재를 고발할 수 있었다.

카를 마르크스가 이 세상에 찾아와 알게 된 것 한 가지. 표면의 사상가는 균형을 잡지만 심오한 사상가는 편을 든다. 표면적 사상에는 거처가 없지만 심오한 사상은 제 자리를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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