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탈시설 장애인의 ‘해방의 경제학’

2018.04.08 20:38 입력 2018.04.08 20:39 수정

“바구니에/ 야채를 넣고/ 과일을 넣고/ 이만원/ 계산대에 가보니/ 오만원/ 과일 빼고/ 야채 빼고/ 참치는 놔두고/ 밥은 먹어야지/ 참치 고추장 참기름은/ 떨어지면 안 돼.” 민들레 장애인야학의 신경수씨가 쓴 시 ‘꼭 사야 할 것’이다. 그는 세 살 때 파출소에 맡겨진 뒤 서른이 다 돼서야 탈시설 자립생활을 시작한 중증장애인이다. 출간 예정인 탈시설 장애인들의 인터뷰집에서 그의 인터뷰와 시 몇 편을 읽었는데, 방금 인용한 시도 여기서 본 것이다.

[고병권의 묵묵]어느 탈시설 장애인의 ‘해방의 경제학’

내가 인상 깊게 본 것은 그의 경제학이다. 계획된 예산을 넘자 그는 계산대 위에 올려놓은 물건들을 하나씩 빼놓는다. 그런데 과일과 야채를 빼내면서도 끝까지 사수하는 재료가 참치와 고추장, 참기름이다. 그는 밥에 참치, 고추장, 참기름을 넣어 비벼 먹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했다. 장애인 수급비가 소득의 전부인 그로서는 지출계획을 신중히 짜야 한다. 특히 식자재는 지출항목 중 비중이 큰 것이어서 신경을 많이 쓴다. 그런데 식자재 구입과 관련해서 그는 영양학보다는 존재론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보인다. 식자재 구매가 내 영양상태보다는 존재 확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참치 고추장 비빔밥은 그가 찾아낸 ‘나의 음식’이다. 물론 수십년을 보낸 수용시설에도 ‘음식’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음식’이었지 ‘나의 음식’은 아니었다.

음식만이 아니다. 시설에는 많은 방이 있지만 내 방은 없다. 한 이불을 덮는 사람은 많지만 나의 연인이나 가족은 없다. 습관조차 그렇다. 여기에는 모든 사람의 습관은 있지만 나의 습관은 없다. 모두가 모두의 시간에 자고 일어나며, 모두의 시간에 옷을 벗고 목욕을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루, 한 달, 일 년, 십 년을 살다보면 기억조차 모두의 기억이 된다. 거기 수용된 사람들에게는 똑같은 일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름은 내 것이라지만 마치 내가 떠난 집에 걸린 문패와 다를 게 없다. 말하자면 시설은 ‘나’를 죽이는 곳, ‘나’의 절멸수용소다.

시설을 나온 뒤에야 경수씨는 자기 음식을 찾았다. “어떤 음식을 먹으면 탈이 나는지도 알게 되었어요. 케이크는 먹으면 바로 설사해요. 짬뽕 매운 건 먹어본 적 없는데 나와서 먹어봤고. 카레도 시설에선 어쩌다 한번 먹어봤는데 나와선 실컷 해 먹고 있어요. 제육볶음은 시설에선 못 먹어본 음식인데 나와서 먹어보고는 반해서, 지금은 제일 잘하는 음식이 됐어요.” 탈나는 음식을 만난 것도 맛있는 음식을 만난 것만큼이나 반가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나’를 만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래봬도 저 쌀 사다 먹는 남자예요.” 쌀 문제로 가면 그의 경제학은 재정학과 거의 무관해진다. 탈시설 후 3년 동안 그는 동사무소에서 주는 쌀 ‘나누미’를 먹었다. 월수급비가 65만원이었는데 집세로 월 40만원이 나가고 관리비를 15만원 내야 한다. 그러니 10만원으로 한 달을 버텨야 했다. 수급비가 생활은 고사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별 수 없이 ‘나누미’라도 감지덕지 먹어야 했다.

그런데 이제는 수급비가 95만원으로 늘었고 집세는 15만원으로 줄었다. 확실히 그때보다 나아졌다. 하지만 한 달 80만원이 여유를 부리며 생활을 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님은 분명하다. 겨우 숨통을 죄던 줄이 조금 느슨해진 정도일 텐데, 그는 곧바로 쌀을 사다 먹는 만용을 부렸다. 재정적으로는 파탄적 행동임에 틀림없지만 존재적으로는 자기 정립적인 행동이다.

“난 쌀맛을 구분한다니깐요! 이게 중요해요.” 이것이 그의 경제학이다. 소비에는 영양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고 지출에는 재정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 그러나 그는 영양 획득이나 재산 획득보다 ‘나’의 획득이 중요하다고 보는 사람이다.

더욱 인상 깊은 것은 시간의 경제학이다. “방학을 없애야 해/ 집회 나가야 해/ 그래서 없애야 해/ 집에 있으면 뭐해?/ 활동 많이 해야지/ 시간 놓치면 안 돼/ 시간이 아까워/ 왜냐면/ 내년에 검정고시 보니까.” 그의 시 ‘방학을 없애야 해’인데, 검정고시 준비하느라 시간이 빠듯한 모양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절대 줄이지 않는 시간이 있으니 바로 집회 나가는 시간이다.

중증 뇌병변장애인인 그는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이용한다. 그에게 할당된 서비스 시간은 월 480시간이다. 이 시간은 말 그대로 생명의 시간이다. 활동보조가 없는 시간이란 누군가에게는 손발이 없고 누군가에게는 눈이 없는 시간이다. 실제로 활동보조 서비스를 받지 못한 시간에 화재가 나서 코앞에 있는 문을 열지 못해 죽은 장애인이 있고 보일러 동파 같은 사소한 사건에도 생명을 잃는 장애인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이 생명의 480시간을 계획하면서 10%인 48시간을 미리 공제한다. 급히 잡히는 농성이나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매월 공제하는 이 48시간이 내가 보기에 그의 경제학의 가장 근본적인 공리다. 계산대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참치와 고추장, 나누미를 대체한 일반미, 야학의 공부시간, 이 모든 것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이 48시간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해방의 시간 앞에 해방을 위한 시간을 공제해두는 것. 이것이 한 탈시설 장애인의 장애해방의 경제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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