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선 절대 ‘위력’의 피해자가 되지 말 것

2018.08.15 20:47 입력 2018.08.15 20:53 수정

법원이 안희정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상호 간에 위력을 행사할 수 있는 관계인 것은 인정되지만, 성적행위에 있어서는 위력이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없고, 피해자가 성적자기결정권을 스스로 행사할 수 있는데도 명시적으로 반항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결국 피해자의 증언은 단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직설]한국에선 절대 ‘위력’의 피해자가 되지 말 것

판사라는 직책은 한국 사회에서 사실상 권력의 최종심급이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위력이라는 게 스위치가 달려서 맘대로 켜고 끄고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의 고용인인 중년 남성을, 거의 매일같이 수행하고 얼굴을 맞대야 하는 여성 비서의 입장에서도 그렇게 될 수 있을 리는 없다. 심지어 피해자는 가해자를 신뢰하고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확실한 권력관계와 개인적인 신뢰, 존경심이 더해진 관계에서 위력이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걷어내 버릴 수 있다는 것은 사법부가 피해자의 성적자기결정권에 대한 판단력을 거의 인공지능 수준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복잡하고 일상에 조밀하게 침투해 있는 권력관계가 오직 성적 접근 앞에서는 명확해지고 냉정해질 수 있단 말인가?

이 재판은 그 과정 자체가 피해자에 대한 가해행위였다. 물론 기소와 재판의 근거가 오로지 피해자의 진술이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사건과 관계없는 피해자에 대한 음해, 억측, 일상생활이 재판과정에서 줄줄이 끌려나왔고, 언론도 가세해 신나게 받아쓰기를 했다. 차기 대선후보이자 도지사이자 가정이 있는 중년 남성이 자신의 부하직원에 대해 성적으로 부적절한 접근을 시도하고 간음한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고, 오로지 피해자의 행실이 피해자로서 적합했는지가 문제였다. 가해자가 살아남기 위해 온갖 추잡한 방법으로 피해자를 공격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지만, 피해자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것은 피해자답지 못하기 때문에 의심을 받는다. 이런 식의 해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절대로 피해자가 되지 말 것.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불가항력에 가까운 것이니, 결론적으로는 피해자가 되거든 구제를 받으려 하지 말고 삶이 파괴되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말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히 말도 뭣도 아니다.

기억하겠지만 안 전 지사는 피해자의 폭로가 있은 후에 자신과 피해자의 관계가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며 사과문을 올리고 도지사직을 사퇴했다. 또 증거로 채택된 휴대폰도 제출을 거부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무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한국의 수많은 곳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권력형 성폭력에 대한 허가를 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권력자들에게는 묻지 않는 것을 약자들에게만 묻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짐으로 지우려 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법에 근거한 것인들 공정함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이미 여성들은 사회가 여성을 보호하기는커녕 못살게 구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행동하고 있다. 그런데 피해를 구제할 수 있는 최종심급이라 할 수 있는 법마저 피해 여성들을 보호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여성들에게 있어 이 나라의 존재가치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다. 이미 미투 운동은 사회가 성폭력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운동이다.

그런데 이번 판결은 공식적이고 온건한 방법으로는 이 억울함들이 해결되지 못할 것이라는 최악의 신호를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은 개개인이 겪는 시련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야말로 사법부가 나서서 사회 붕괴를 촉진하고 있는 것이다.

국회는 하루속히 관련 입법들을 진행하라! 사법부는 판검사들의 성인지적 관점에 대한 대대적인 재교육과 개혁을 실시하라! 행정부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해 성폭력에 엄정하고 단호하게 대처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는 것은 이 나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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