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준

2018.08.20 20:32
정지은 | 문화평론가

새로운 기준을 하나 만들었다. 순전히 나 개인의 기준이니 타인에게 구속력은 없다. 다만 내가 관여하거나 참여할 수 있는 한 이 기준을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한다. 포럼·강의 등 각종 행사나 영화·TV프로그램, 이런저런 미팅을 포함해 회의나 각종 위원회까지 영역은 다양하다. 원칙은 딱 하나다. 여성이 일정 비율 이상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이 한 명이라도 섞여있지 않으면 ‘보이콧’한다. 방송이면 채널을 돌리고 영화는 보지 않으며 강의나 세미나도 패스한다. ‘스크린 쿼터제’와도 비슷한데 나만의 ‘인생 극장’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일종의 여성 쿼터제다.

[직설]어떤 기준

물론 생물학적 성별로만 이러한 기준을 들이대는 게 불편할 수도 있다. 나 역시 ‘여성이라고 다 같은 여성은 아니다’라는 입장이었지만, 질을 따지기에는 기초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현실이니 어찌하랴. 처음에는 전체 구성원 중 여성이 딱 한 명인 경우에도 배제했는데, 그렇게 하다보니 탈락 비율이 너무 높아져서 할 수 없이 기준을 조금 완화했다.

업계 특성이 무엇이든 발언권을 얻는 사람들은 대체로 40대 이상 남성들이다. 이렇다보니 ‘여성 쿼터제’를 지키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나마 회의나 포럼 같은 자리에서는 최소한 형식적으로라도 남녀 비율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추세라는 게 위안이다. 하지만 방송이나 영화는 여전히 여성이 한 명도 나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흥행하거나 주목받는 콘텐츠인데도 여성이 전무한 경우가 이렇게 많다니! 백번 양보해 여성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한정된 역할이거나 소비되는 캐릭터거나 가장 어리다.

이 이야기를 꺼내면 주변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요즘 시대에는 당연하지’라는 호응이 하나, ‘무슨 소리인지 알겠는데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구느냐’는 타박 겸 핀잔이 또 하나다. 그럴 때 나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관 이야기를 꺼낸다. “사람들은 제게 묻습니다. 여성 대법관이 몇명이 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전 이렇게 답하죠. 9명 모두요. 사람들은 놀랍니다. 하지만 미국 역사상 대법관 9명은 모두 남자였죠.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죠.”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대법관인 이 멋진 선구자의 대답은 후자의 말문을 막히게 하는 데 효과 만점이다. 하지만 꼭 따라붙는 이야기가 있다. “내가 여성을 부르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부를 사람이 없어”라는 푸념이다. 내 대답은 “기획자가 게으르거나 미처 알지 못했거나, 아니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니 잘 찾아보시라”로 끝난다.

영역을 막론하고 여성의 운동장은 애초부터 다르게 설정되어 있다. 한국 사회는 남성의 실수에 너그럽지만 여성의 실수에는 유독 가혹한 잣대를 들이댄다. 같은 불법촬영 사건에 법원이 내린 판결이 얼마나 달랐는지 기억할 것이다. 범죄에만 그런 것도 아니다. 남자 아이돌과 여자 아이돌의 실수에 언론사들이 어떤 헤드라인으로 반응하는지 생각해보면 답은 분명하다. ‘아이돌’을 ‘직장인’으로 바꾼다고 해도 현실은 비슷하다. 그러니 애초에 직위나 경력 등의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 누군가를 찾아내고 기회를 준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

실제로 나는 ‘사라진 여성들’에 대해 아주 많은 예를 들 수 있다. 직장이 없어서, 직장을 오래 못 다녀서, 나이가 어려서 등등 이유는 많지만 가장 큰 결격사유는 바로 ‘여성’이었다. 그러니까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괜찮은 기획자라면 당연히 이런 현실을 감안하고 어떤 식으로든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 쿼터제는 최소한의 보루인 셈이다. 젠더 감수성 역시 기획자, 제작자, 언론인 등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모든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요소다. 하지만 딱 한 명이면서 여성 출연자가 생겼다고 자랑하는, 아저씨들로만 가득한 방송이 신규 편성되는 현실을 보면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래도 기대한다. 이 기준을 들이대지 않아도 마음 편히 TV 예능이나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그날을….

“여성이 두 명이구나. 그런데 두 사람이 비슷하지 않아. 항상 같은 편에 서는 것도 아니야. 그렇지만 어찌 됐건 여성이 둘이야.” 대법원의 유일한 여성동료였던 샌드라 데이 오코너 미국 최초 여성 연방대법관의 존재에 대해 긴즈버그 대법관이 말했던 것처럼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더 많은, 더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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