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농민 응원한 홍콩의 현실

2019.10.03 20:34 입력 2019.10.03 20:38 수정

초·중·고생 때 최고의 인기 영화 장르는 ‘홍콩누아르’였다. ‘주윤발’ ‘장국영’ ‘유덕화’ 팬시 제품은 아이돌 ‘굿즈’의 원조였을 것이다. 내가 처음 접한 홍콩은 영화를 통해서다. 외양은 나와 같은 동양인이지만 영어식 이름도 많고, 영어에도 익숙한 사람들, ‘빅토리아 공원’ ‘프린세스 마거릿 병원’ 같은 지명도 영국풍인 곳. 영국의 지배를 99년간 받다 1997년 중국에 반환되어 일국양제(一國兩制)를 표방하고 있다는 정도만 알 뿐이다.

[먹거리 공화국]한국 농민 응원한 홍콩의 현실

그러다 홍콩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2005년 12월 홍콩에서 6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렸다.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5차 WTO 각료회의에서 ‘WTO가 농민을 죽인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이경해 농민이 목숨을 끊었고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렇게 칸쿤 회의가 무산된 뒤 홍콩에서 2년 만에 재개된 WTO 회의였다. WTO 체제로 상징되는 ‘세계화’의 가장 큰 희생 부문은 농업 부문이다. 그래서 반세계화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들도 농민이다. 2005년 12월 900여명의 한국 농민들이 홍콩으로 향했다. 당시 홍콩의 주요 언론에서는 과격한 한국 농민과 노동자들이 온다고 보도했고, 홍콩 정부의 경계도 매우 삼엄했다. 한국의 유수 언론은 나라 망신시키러 간 ‘폭도’ 정도로 보도했다. 그런데 막상 홍콩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미담’에 가까웠다. 폭력시위가 아니라 평화시위의 상징이 된 ‘삼보일배’를 올리고, 섬에 마련된 각료회의장까지 가기 위해 구명조끼를 입고 수백 명의 농민들이 그대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한국 언론은 마치 ‘한류 열풍’의 일환처럼 소개하기도 했다.

냉랭하거나 부정적이었던 홍콩 시민들도 사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상업과 금융으로 특화된 세계 도시인 홍콩에서 나고 자란 시민들이 ‘농민’의 입장에서 세계화의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홍콩의 시민들은 ‘한국 농민 힘내라’는 피켓을 들어주었고 택시의 경적을 울려 응원을 보냈다. 빵과 음료수를 넘치도록 가져다주고, 숙소 앞에 바나나를 몇 박스씩 쌓아 놓기도 했다. 심지어 식당에서 투쟁단의 밥값을 대신 치러주기도 했다. 시위대가 홍콩 경찰들에게 한꺼번에 연행되자 항의를 해준 이들도 홍콩 시민이었다. 그렇게 WTO 각료회의를 무산시키고 투쟁단은 풀려났지만 마지막까지 11명의 농민과 노동자들이 풀려나지 못한 채 홍콩에 구금되었다. 이때 투쟁단의 신원을 보증하겠다고 나선 이는 가톨릭 홍콩교구의 조지프 쩐 추기경이었고, 홍콩 시민들의 많은 도움으로 11명은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기자회견에서도 홍콩의 시민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여전히 농민들은 그때의 뜨거웠던 ‘홍콩의 밤거리’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하지만 홍콩은 지금 큰 혼란에 빠져 있다. ‘범죄인 인도 조례’(송환법)로 촉발된 홍콩 시민들의 시위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홍콩 시민들은 홍콩의 보통선거 실시와 경찰 폭력에 대한 독립 조사기구 구성과 사죄, 송환법의 완전한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급기야 시위 과정에서 18세의 고등학생이 경찰이 쏜 총탄에 맞았다. 홍콩의 역사와 싸움의 맥락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총구를 시민에게 겨눴다는 것만큼은 분노할 수밖에 없다. 2005년 홍콩에서 한국 농민들을 응원하고 빵과 음료수를 건넨 홍콩 시민들이 지금 그 거리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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