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방송연예대상에 비친 ‘송은이’

2019.12.30 20:57 입력 2019.12.30 21:02 수정

대한민국 시상식의 수상 소감은 ‘황정민 이전’과 ‘황정민 이후’로 나뉠 것이다.

“저는 항상 사람들한테 그래요. 일개 ‘배우 나부랭이’라고요. 왜냐하면 60명 정도 되는 스태프들이 멋진 밥상을 차려놔요. 저는 그럼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거든요. 그런데 스포트라이트는 제가 다 받아요. 그게 죄송스러워요.”(2005년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 소감)

[김민아 칼럼]MBC 방송연예대상에 비친 ‘송은이’

황정민만큼은 아니더라도, 지난 29일 열린 MBC 방송연예대상의 수상 소감도 인상적이었다. 3수 끝에 대상을 거머쥔 박나래. “제 키가 148(㎝)이다. (대상 타고) 여기 올라와 처음으로 여러분들 정수리를 본다. 제가 볼 수 있는 시선은 여러분의 턱이나 콧구멍이다. 항상 여러분의 바닥에서 위를 우러러봤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다. 언제나 낮은 자세로 임하겠다.” 음주운전으로 적발돼 자숙기간을 보냈던 노홍철(뮤직&토크부문 최우수상). “5년 전 아주 나쁜 일로 죽을죄를 지어서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죽을 때까지 그 무게를 견디고 살아가겠다.” 두 사람 다 자신의 약점이나 과거를 ‘쿨’하게 드러내며 미래를 다짐했다.

내가 꼽는 ‘베스트’는 뮤직&토크부문 우수상의 안영미다. “내가 방송용이 아니라 생각하고 많이 위축되고 방송을 두려워했었다. 먼저 손 내밀어주고 키워주고 사람 만들어준 송은이, 김숙 선배님께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어버이 같은 분들이다. 앞으로 ‘송김안영미’로 살고 싶다.”

안영미는 스스로 고백했듯 ‘방송용’, 특히 ‘지상파용’은 아니었다. 젊은 여성 연예인으로는 희귀하게 주특기가 ‘19금 개그’여서다. 생존을 고민하던 그는 송은이가 주도한 프로젝트 걸그룹 ‘셀럽파이브’(송은이·김신영·신봉선·안영미)에 참여하며 활로를 찾았다. 대중의 공감을 얻기 시작한 안영미는 <라디오스타> 역사 12년 만에 첫 여성 MC로 발탁됐다. 김국진이나 윤종신도 꼼짝 못하던 독설가 김구라에게 ‘돌직구’를 날리며 ‘구라 잡는 영미’ 캐릭터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송은이 하면 떠오르는 단짝 김숙도 이날 뮤직&토크부문 최우수상을 탔다. 그는 “25년 만에 처음 MBC 시상식에 왔다”며 눈물을 흘렸다. 송은이도 버라이어티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는 “(김)숙아 너무 축하해! 안영미야 고마워! 내 자식이 되어주어서! 내일 호적신고하러 가자!”는 재치 있는 소감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오늘날의 김숙을 이끌어낸 사람도 송은이다. 송은이가 TV 밖으로 나간 건 2015년 팟캐스트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을 열면서다. 지금이야 도전과 성공의 기록으로 상찬받지만, 그때는 불러주는 방송사가 없어 사비를 털었다. 송은이와 김숙은 남편도 아이도 시집도 없는, 그래서 상품성도 없는 40대 비혼 여성 예능인이었다. 다행히 <비밀보장>이 빅 히트를 기록하며 새 길이 열렸다. 송은이는 기획 제작사 ‘콘텐츠랩 비보’를 설립하고 유튜브 채널 ‘비보TV’를 열었다. <비밀보장>과 비보TV의 일부 콘텐츠는 <영수증>(KBS) <밥블레스유>(올리브) 같은 TV 정규 프로그램으로 확장 개업했다. 셀럽파이브도 비보TV 웹예능 ‘판벌려’를 통해 결성됐다. 2017년 ‘원더우먼 페스티벌’에 출연한 송은이는 “회사를 설립하며 엑셀을 배우기 시작했다”며 “한 번은 실수로 월급을 두 번 넣은 일도 있었다. 그렇지만 어떠냐”고 했다.

예능계는 남성 중심이다. 강호동·신동엽·유재석·이경규 같은 강호의 고수들은 물론, 요즘에는 서장훈·안정환·허재 등 ‘전직 국(가)대(표)’들까지 뛰어들었다.

서울YWCA가 지난 8월 한 달간 8개 지상파·종합편성채널·케이블 방송의 18개 예능 프로그램을 분석한 결과 고정출연자 성비는 여성이 27.1%, 남성이 72.4%로 나타났다. 주 진행자 중 여성은 25%, 남성은 75%로 3배 차이에 달했다. 박미선은 지난달 KBS <스탠드 업>에서 이야기했다. “이경규, 강호동, 신동엽, 김구라 이렇게 쭉 앉아 있으면요. 우리(여성 예능인)는 조금만 빈자리가 있으면 비비고 들어가서 앉아야 합니다.”

송은이는 이처럼 척박한 예능판에 균열을 내고 있다. 이른바 ‘송라인’을 만들어 기존 판에 후배들을 꽂아넣는 방식이 아니다. 판의 문법을 바꿔 여성 예능인들의 영역을 창출하고 확장한다. 문자 그대로 ‘크리에이터’다.

MBC 방송연예대상에선 지난해 여성 대상 수상자(이영자)가 올해의 여성 대상 수상자(박나래)와 포옹하는 장면이 펼쳐졌다. KBS 연예대상에선 프로그램을 3개나 진행하고 대상 후보에도 오른 김숙이 무관에 그쳤다. SBS 연예대상의 대상 후보는 8명 모두 남성이었다. 3사 연예대상 중 시청률 승자는 MBC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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