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가 넘은 선, 우리도 넘을 수 있을까

2020.02.13 20:34 입력 2020.02.13 20:38 수정

20여년 전 미국 유학생들은 비디오테이프 한 보따리로 향수를 달랬습니다. 구석에서 비디오 복사하는 한국 식료품 가게가 흔했습니다. 한 집에서 잔뜩 빌려다 놓으면 다음 집에서 보고 또 돌려보고 했죠. 돈도 들고 수고스럽기도 하니 한국방송을 보기 쉽지 않았습니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죠. 인터넷으로 실시간 뉴스를 봅니다. 한류팬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할리우드의 반대쪽 미 동부 시골이라 그런지 한국영화를 개봉하는 일은 없습니다. <기생충>이 개봉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세상읽기]오스카가 넘은 선, 우리도 넘을 수 있을까

반가운 마음에 극장에 가서 봤습니다. 직장 동료도 보러왔더군요. 그리고 지난 주말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감독상을 받은 것도 믿기지 않았지만, 작품상을 받으며 대미를 장식할 땐 함성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뿐이 아니었죠. 세계 곳곳에서 <기생충>, 봉준호 감독, 그의 예전 작품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 말대로 ‘로컬영화제’인, 백인 남성 위주라는 오명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였기에 더더욱 놀랍고 뜻깊습니다. 미국에서는 외국영화가 흥행이 안됩니다. 아무리 좋은 영화도 미국 시장에서는 맥을 못 추죠. 한 분석에 따르면 총티켓 판매액의 1%도 못 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미국 사람들은 외국영화를 안 보는 겁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미국영화의 인기가 가장 크지 않을까 합니다. 외국에서도 인기가 많은데(2019년 한국 영화시장 매출액 27%가 미국영화였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오죽 좋아할까요. 굳이 외국영화를 찾아볼 필요를 못 느끼는 겁니다.

<기생충>도 마찬가지입니다. 2월10일 현재 미국 시장 총수입은 3603만2519달러로 430억원 정도 됩니다. 이것도 대단합니다. 앞으로 더 늘겠죠. 그래도 미국영화에 비하면 아직은 초라합니다. 이번 학기 가르치는 학생이 약 80명인데 물어보니 들어본 사람이 네댓 명, 본 사람이 두 명이었습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아카데미는 최고의 영예를 <기생충>에 준 겁니다. 물론 뛰어난 작품입니다. 하지만 <기생충>만 한 외국영화가 없진 않았죠.

그렇다면 왜 <기생충>일까. 인종, 성별 등에서 다양성이 없다는 비난에 대한 자정 노력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동적 사회 흐름에의 할리우드식 저항도 <기생충>의 성공에 한몫을 했을 겁니다. 변화하는 사회에 뒤지지 않기 위해 이선균 배우 말대로 <기생충>이 아닌 “오스카가 선을 넘은 것”이죠.

청룡영화상은 그 선을 넘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선을 넘을 수 있을까요?

2016년 <곡성>의 구니무라 준이 남우조연상을 받은 게 외국인으로 유일합니다. 최우수 외국영화상도 1990년에 와서야 시작했지만 1995년을 끝으로 없어졌습니다. 그나마 수상작도 다 서구 영화였죠. 익숙지 못한 태국영화에 작품상을 주면 다음날 어떤 기사가 실릴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하긴 제3국가 출신 외국인 노동자, 이민자들이 겪는 고초를 생각하면 이는 한가한 소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불안한 신분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임금체불,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환경, 성폭력 등의 고초를 견뎌내고 있습니다. 모두가 개선책을 논의해도 갈 길이 먼데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외국인은 세금도 안 냈고, 기여한 바도 없다”며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임금 차등 지급을 주장했죠. 인권 차원에서도 문제이고, 법적으로도 “국적·신앙·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근로조건에 대한 차별적 처우를 하지 못한다”는 근로기준법 제6조 위반 소지가 있습니다.

선을 넘기에 저들과의 경계선은 아직 너무 멀리 있어 보입니다. 게다가 그 선은 길고 높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늘리고 높여도 그 선은 넘어지게 돼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사회라는 게 유지되지 않기 때문이죠. 코를 막고 칼에 찔릴지, 선을 넘어 연대의 손을 내밀지 결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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