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역 주체’에서 ‘전환 주체’로

2020.03.23 20:46 입력 2020.03.23 21:11 수정

[이문재의 시의 마음]‘방역 주체’에서 ‘전환 주체’로

손꼽아 세어보니 열 번이 넘는다. 아파트 출입문을 열 때 여섯 번, 집 안으로 들어설 때 또 여섯 번 번호판을 눌러야 한다. 2층에 살아서 엘리베이터 버튼에 손대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배달음식이나 택배가 오면 또 긴장한다. 배달하는 분이 마스크를 썼는지 즉각 확인하고 얼른 물건을 받아드는데 그때마다 손잡이 부분이 신경 쓰인다.

[이문재의 시의 마음]‘방역 주체’에서 ‘전환 주체’로

밖에서도 마찬가지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마다 예민해진다. 손잡이를 잡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코로나19 사태가 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일상적 삶은 다름 아닌 손을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엄연한 사실을 절감한다. 사회생활이란 수많은 문을 드나드는 것이고, 그 문은 매번 손을 써야 여닫을 수 있다. 과학기술이 진전하면서 손의 역할은 크게 줄었지만, 손이 하는 일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손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를 연결한다.

어디 손뿐이랴. 신종 감염병이 낯익었던 모든 것을 낯설게 한다. 그중 하나가 사회적 거리다. 다른 사람과 1~2m 간격을 두라는 것인데, 이 범세계적 캠페인은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얼마나 많은 비말(飛沫)을 공유하고 있는지 깨닫게 한다. 집과 일터를 비롯해 학교, 대중교통, 극장, 거리에서 우리는 같은 공기를 마신다. 내 날숨이 누군가의 폐로 들어가고, 누군가의 날숨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사람과 새, 사람과 나무도 다르지 않다. 뭇생명은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신종 감염병은 기왕의 체제와 시스템의 이면을 노출시켰다. 자본주의 경제의 취약성이 그대로 드러났다. 시민들(소비자)이 이동을 멈추자 시장이 얼어버린 것이다. 개별 국가의 안이한 대처도 동시다발로 노출됐다. 대부분 국가가 관성에 젖어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인지했다. 선진국이라고 해서 공공의료 수준이 높은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 지적했듯이 의료는 전적으로 정치 문제라는 사실이 또 한 번 판명됐다.

신종 감염병이 ‘세계적 대유행’ 단계로 접어들자 지구촌 곳곳에서 또 다른 민낯이 목격됐다. ‘2차 대전 이후 최대의 위기’라고 선언하고 나선 유럽에서는 그들이 자랑하던 관용(포용)의 문화가 혐오를 넘어 적대로 증폭됐다. 아시아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가 하면, 화장지와 식료품을 사재기하고,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맨얼굴로 거리를 활보했다. 물론 그곳에도 ‘선한 사람들’이 있어 자가격리 중인 이웃을 찾아 위로하고, 봉쇄된 도시의 아파트 베란다는 합창 무대가 되기도 했다.

전 세계가 신종 바이러스와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장기 비상사태에 대비해야 한다는 경고음이 들린다. 재난이 일상화할 것이라는 예측은 기후학자들이 벌써부터 제기해왔다. 지구 평균 기온이 급상승할 경우 우리가 감수해야 할 재앙은 상상을 초월한다. 기후위기에 견주면 이번 사태는 일시적으로 보인다. 신종 바이러스는 언젠가 약해질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19에 대한 개인, 지역, 국가, 세계의 대응이 근시안적이어서 안타깝기만 하다.

최근 우리나라 정부가 내놓은 대책 중내 눈길을 붙잡은 것이 있다. ‘국민 모두가 방역의 개인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국민들이 저마다 방역 주체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손을 자주 씻고, 외출을 삼가며, 밖에서는 마스크를 쓰고 타인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매 순간 내가 나를 관찰해야 한다. 무의식적 행동을 매 순간 의식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위빠사나(마음챙김) 같은 종교 수행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이렇게 거대한 규모로, 또 이렇게 같은 시간대에, 그것도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삶을 살펴보게 된 적이 있었던가. 나는, 우리가 저마다 진정한 방역의 주체가 된다면, 그래서 2주 가까이 자신의 일상을 깊이 성찰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도달하리라고 생각한다. 이 사태를 극복하고 돌아가고 싶은 일상은 과연 어떤 것인가. 코로나19 이전의 ‘나’로 돌아가면 그만인가. 지금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정상화’가 예전과 다름없는 삶과 사회, 예전과 똑같은 국가와 문명인가. 의철학자 조르주 캉길렘은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건강을 회복한다는 것은 원상태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방역을 하면서 원상회복이 아니라 다른 미래를 설계하는 주체가 바로 ‘전환의 주체’다. 이번에 우리가 전환의 주체로 재탄생할 수 있다면 또 다가올 전염병은 물론 기후위기를 비롯한 장기 비상사태에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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