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싸와 인싸, 씁쓸한 분화

2020.04.26 20:52 입력 2020.04.26 20:59 수정

최근 대학 커뮤니티에서 소위 인싸들이 아싸의 정체성을 패션처럼 두르고 다닌다며 ‘빼앗긴 아싸’에 대한 비참함을 드러낸 글이 화제가 되었다. 이상했다. 왜 아싸를 빼앗겼다고 쓴 걸까. 아싸는 빼앗을 만큼 좋은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씁쓸한 표현이다. 그런데 인싸들조차 이젠 스스로를 아싸라고 말한다. 어쩌면 아싸야말로 청년세대 전반의 정서가 된 것은 아닐까.

[지금, 여기]아싸와 인싸, 씁쓸한 분화

돌이켜보면 난 인싸란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20대 때에는 인싸란 평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친구를 만나고 연애를 하고 집단에 소속되는 것들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구별 지을 필요가 없었던 이들을 구별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언가 세태가 바뀌었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청년들에게는 아싸라는 표현이 스스로 처한 현실을 더 잘 드러내 주는 말이 되었기에 인싸와 아싸를 구별하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더 이상 인싸는 평범하지 않은 것이다.

나도 아싸인 시기가 있었다. 돈 1만원이 없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할 때의 비참함. 학비도 용돈도 가득 받으며 어학연수를 가거나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동기에 대한 부러움. 훤칠한 외모와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인정과 사랑을 듬뿍 받는 친구에 대한 시기와 질투.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고 다독이면서도 밀려오는 외로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 모든 아싸가 이렇지는 않지만, 마음속 열등감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어려웠다.

자발적인 아싸가 아니라면, 아싸로 지내는 시간이 썩 즐겁지 않을 것이다. 친구를 만나고 연애를 할 여유가 없는 마음. 취미활동 대신 취업준비를 하는 시간. 취미에 돈을 쓰는 것 대신 학자금과 생활비를 충당해야 하는 현실. 늘 남들과 비교당하는 일들에 무뎌져야 하는 매일. 어울림이 어려워진 젊음에게 인싸란 그 자체로 풍요롭다. 반면 아싸란, 선택할 여유가 없고 늘 조마조마한 젊음의 자조적인 한탄에 가깝다. 이들이 스스로를 아싸라고 부르는 것에는, 그만큼 박탈감과 소외감이 서린 일상을 지내기 때문은 아닐까.

최근에는 인싸 아싸로도 모자라 아싸 안의 찐따, 인싸 안의 핵인싸처럼 사람들을 더욱 촘촘히 가른다고 한다. 끊임없이 서로를 비교하고 정체성을 나누는 것은, 필연적으로 더 많은 차별, 소외와 박탈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렇듯 서로를 상처 입히고 확인하는 일로 살아가는 시간은 잘 낫지 않는 깊은 상흔을 남긴다. 정작 자신을 규정할 필요 없는, 여유로운 환경과 친밀한 관계 속의 사람들은 관심도 없건만 비교하고, 비교당해야 하는 비극에 처한 이들이 그 무거운 고통을 감당하고 있다.

불황과 좁아진 취업문, 격렬한 경쟁, 무너진 성비, 양극화 심화 등은 청년들의 삶을 압박한다. 비단 대학생만이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청년들은 학벌·소득과 상관없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미디어를 통해 전시된 삶의 모습에 끊임없이 노출된다. 타인의 소외와 박탈에 대해 신경 써 볼 겨를도 없이 자신의 삶을 비교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 어떤 인싸도 어느 날엔 아싸가 되고, 아싸인 이들은 자신의 슬픔마저 패션으로 소비한다는 상대적 비참함을 느끼기도 한다. 자조 섞인 아싸라는 표현을 빼앗는 인싸와, 그 인싸마저 스스로를 아싸로 규정하고자 하는 모습은 그래서 비극적이고 슬픈 일이다.

늘 비교당하는 사회 속에서, 청년들에겐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만큼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일이 더 많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사회가 청년들의 이런 현상에 대해 단순히 젊은 시절의 문제라고 치부하지 말고 함께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들에게 드리운 그림자에 사회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이들에게는 비교를 거부할 수 있는 희망과, 조금 덜 외로운 일상이 필요하다. 차이를 없앨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들이 아싸와 인싸의 그림자를 이겨낼 만큼의 희망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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