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녹피대전

2020.10.15 03:00 입력 2020.10.15 03:05 수정

조선시대 재정 백서 <만기요람>에 따르면 가장 값비싼 가죽은 표범가죽이다. 호랑이가죽의 가격은 표범가죽의 3분의 2에 불과했다. 호랑이의 줄무늬보다 표범의 둥근 무늬를 선호해서란다. 그다음이 사슴가죽이다. 가격이 호랑이가죽과 별 차이가 없다. 그다음이 수달가죽, 돼지가죽, 노루가죽 순이다. 노루는 사슴과 비슷한 동물이지만 노루가죽은 싸구려다. 사슴가죽의 10분의 1 수준이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사슴가죽이 비싼 건 특유의 신축성 때문이다. 섬세한 섬유다발로 이뤄진 사슴가죽은 잡아당기면 늘어나고, 손을 놓으면 원래대로 줄어든다. 무두질을 거치면 더욱 부드러워지고 탄력이 좋아진다. 그래서 ‘숙녹피대전’이라는 말이 생겼다.

‘숙녹피’는 무두질한 사슴가죽이고 ‘대전’은 법전이다. 신축성 뛰어난 사슴가죽을 맘대로 늘이고 줄이는 것처럼 법관이 법조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는 뜻이다. 녹피왈자(鹿皮曰字)라고도 한다. 사슴가죽에 ‘가로 왈(曰)’을 쓰고 위아래로 당기면 ‘날 일(日)’이 되는 것처럼 역시 법을 멋대로 적용한다는 말이다.

숙녹피대전은 언어의 본질적인 한계에서 기인한다. 추상적 언어는 구체적 현실을 온전히 반영할 수 없다. 이 점은 “말할 수 있는 도(道)는 도가 아니다”라는 노자(老子)의 명제 이래 모든 철학자의 공통된 의견이다. 법 역시 언어로 이뤄졌다. 추상적·일반적인 법을 구체적이고 특수한 현실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해석의 차이가 생기는 건 당연하다.

입법 절차가 폐쇄적이라는 점도 문제였다. 조선시대의 입법권자는 국왕이다. 국왕의 명령이 곧 법이다. 하달받은 왕명을 수교(受敎)라고 하는데, 법과 동일한 효력을 발휘한다. 일종의 시행령이다. 수교는 해당 관청과 관원에게만 전달되므로 백성 입장에서는 알 길이 없다. 수십 년이 지나 어느 정도 쌓여야 비로소 책으로 엮는다. 폐쇄적인 입법 절차는 자연히 법률 정보의 비대칭을 야기한다. 법을 잘 아는 사람에게 유리한 구조다.

게다가 수교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나오는 것이라 상호 충돌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특정 사안에서 어떤 수교를 적용할지 판단이 필요하다. 이 판단을 담당하는 이가 율관(律官)이다.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관리다. 법률에 해박한 율관은 필수적 존재였다. 문제는 이들이 정파적 입장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수교를 달리 적용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맘만 먹으면 수많은 수교 중 입맛에 맞는 걸 골라내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다. 같은 죄를 저질러도 처벌이 다른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율관의 자의적·편파적인 법 적용은 숙녹피대전이라는 오명을 낳았다.

며칠 전 법무부 국정감사는 대한민국의 법이 여전히 법을 잘 아는 자들을 위한 숙녹피대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혐의가 짙어도 수사와 기소를 합법적으로 중지하는 것도 가능하고, 변호인이 누구인지에 따라 불법이 합법으로 바뀌기도 한다. 해명이 거짓으로 드러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 그랬다고 하면 그만이다. 이 또한 합법이다. 법이 공정하다는 믿음이 사라진 사회에서 합법은 핑계에 불과하다. 법에 명시된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혼자만 누린다면 그것은 기본권이 아니라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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