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야, 문제는 정치야

“21세기 들어 전 세계 국가들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다. 탈규제와 금융 폭주, 자동화와 세계화가 초래한 경제 구조 변화, 이에 따른 노동 계급 감소와 영향력 저하. 이런 위협에 대응키 위해 사회민주주의(social-democratic compact)를 새롭게 개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중략) 가장 중요한 건 독점 대기업 권력을 줄이고, 공공 의료와 공교육을 포함한 다양한 공공 서비스를 넓히는 정책적 결단이다. 더불어 노동자들이 저임금과 고용 불안정에 시달리지 않도록 최대한 보호해야 하며 연구·개발(R&D)에 집중 투자해야 한다.”

이 부분만 보면 비주류 마르크스 경제학자가 쓴 것처럼 보이겠지만 잠재적 노벨 경제학상 후보이자 주류경제학자인 대런 애스모글루(MIT 교수)가 2019년에 기고한 글이다. 그는 시장의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했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미국 전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영국 전 총리는 정부의 역할을 폄하하고 무조건 감세를 외쳤다. 그 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보수우파들은 자유시장경제의 완승을 자축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정치적 좌우 극단주의의 부상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의 분석과 처방이 바로 한국에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말하고 싶은 것은 입만 열면 자유시장경제를 외치는 현 정권과 한국 보수의 허약함이다. 한국시장을 들여다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고 그렇다고 국제적 시야가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이러니 뭔가 정책을 던지기는 하는데 책임은 질 수 있는지 믿을 수가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총선 패배 이후 기득권이 개혁에 저항한다고 비판했다. 겉으로는 그럴듯하지만 공허하다. 현 정부가 정권 초에 은행들을 독과점, 카르텔 집단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시장경쟁 강화를 외칠 때부터 이상했다. 경제학에서 시장경쟁의 적은 독과점이라고 가르친다. 국내 은행산업에서 소수 몇개 은행의 시장점유율이 높은 것도 맞다. 그런데 은행산업은 전통적으로 금융시장 안정성을 위한 진입규제산업이라 경쟁이 제한된다. 무한경쟁을 외치는 시장이 아니라는 뜻이다. 또, 한국은 코로나19 전에 인터넷은행을 진입시켜 이미 경쟁을 일부 강화하기도 했다. 현 정권은 시장숭배를 외치면서 뭔가 정책을 던지는데 디테일이 없는 것이다. 더 문제는 한국에서 시장 독과점 문제에 접근하려면 재벌을 봐야 하는데 이 문제에는 손을 놓고 있다는 것이다. 재벌(상호출자제한집단)의 매출총합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대략 80% 후반대에 이른다. 이런 집단은 놓아두고 시장경쟁을 외치면 시장이 효율화되겠냐는 말이다.

현 정부의 특징 중 하나는 무슨 문제가 터지면 초반에는 시장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하다가 결국 문제가 악화되고 나서 시장에 개입하는 것이다. 물가문제를 보자. 초반에는 넋 놓고 있다가 작년 11월에 28개 주요 농식품 품목에 전담자를 지정해 중점 관리할 계획을 밝혔다. 빵 서기관, 우유·아이스크림 사무관, 라면 사무관 등이 등장한 것이다. 총선 패배 이후에 내놓은 특단의 물가대책은 전기요금에 포함된 전력산업기반기금 부담금 인하, 항공요금에 포함됐던 출국납부금 인하, 10년짜리 복수여권 발급 시 내야 하는 국제교류기여금 인하 등이다. 정부 개입을 통한 강력한 관리 정책이다. 이런 정책에 대한 이론적 시시비비를 떠나서 한국은 정부 개입으로 물가관리를 해왔고 심지어 물가관리 사무관은 보수 정부인 이명박 정권 이후 부활한 것이다. 나는 이제 말과 행동이 다른 보수 정부의 유체이탈이 안타깝기까지 하다.

일본 정부가 네이버와 일본 기업 소프트뱅크가 공동 지배하는 라인야후에 지분구조 개편을 요구한 문제도 그렇다. 문제가 터졌을 때 대통령실 첫 대응은 민간기업이 자율적으로 알아서 할 일이라는 것이었다. 이 반응을 보고 참 한가하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2010년대 이후 전 세계 자국 중심 경제정책은 단순히 수입에서의 관세부과만 있는 게 아니다. 다국적기업의 공급망사슬, 해외직접투자, 인수·합병에 정부차원의 태클이 걸리기 시작한 게 한참 전이다. 미국 제약회사 화이자가 영국 아스트라제네카를 인수하려다 영국과 미국 정부의 집중견제를 받은 게 2014년이다. 영국 정치권은 화이자의 자국기업 인수로 인한 고용 감소와 산업기반 붕괴를 우려했고 두 기업 최고경영자는 영국 의회 청문회에 불려다녔다. 이런 신보호무역주의가 마냥 옳다는 게 아니다. 정치는 현실이기에 정부가 한가하게 시장자유주의나 외치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가 아니라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 시대가 도래한 지가 언제인데 현 정부는 혼자서 고고하게 뒷짐 지고 있다.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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