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피해인 줄 몰랐다는 거짓말

2020.10.26 03:00 입력 2020.10.26 03:03 수정

실행력만큼은 넘친다고 자부하는 ‘프로민원러’로서, 나는 수시로 여기저기 민원을 넣는다. 세상을 왜 그렇게 삐딱하게 보고 피곤하게 사냐며 핀잔 주는 사람도 가끔 있지만, 하는 일이 이렇다보니 자꾸 보이고 들리는 걸 어쩌랴.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한 이주여성이 어린아이 앞에서 건장한 체격의 남편에게 가차 없이 두들겨 맞는 동영상이 뉴스에 도배되던 날이 있었다. 눈을 의심하며 그 동영상을 보다가 분노에 기름을 뿌리는 뉴스 멘트를 들었다. 피해 여성이 어떤 방법으로 그 동영상을 촬영했는지에 대한 쓸데없이 자세한 설명이었다.

촬영 방법을 강조한 일부 기사의 댓글은 더 가관이었다. ‘일부러 작정하고 찍은 것 아니냐’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찍은 것 같다’ 등 아무말 대잔치가 피해 여성을 괴롭히고 있었다. 가해자는 그 영상으로 인해 자신이 과도한 사회적 비난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이후라도 피해자에게 보복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더 큰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게다가 피해자는 가해자와의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 이 둘이 법적으로 혼인관계에 있다면 가해자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 후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벗어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상황이 쉽게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영상을 찍은 방법과 경위를 자세히 보도하는 것은 이 여성을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는 것과 같다. 그래서 영상 촬영 경위 관련 정보를 언론에 알린 사람을 징계해 달라는 민원을 제기했다.

얼마 전, 술을 마시고 잠들었다가 성폭력 피해를 입은 한 여성과 상담하던 중 ‘어떤 점이 제일 힘든지’를 물었다. “댓글이오.” 의외의 대답에 선뜻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짐작되지만 현실적으로 특별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기사 정정이나 삭제 요청은 대부분 무시된다. 정식 절차를 밟아 기사를 삭제하려 해도 이미 많이 확산된 후라서 실익이 적다.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기사를 삭제하는 것은 법원의 판결을 받는 것보다 더 어려울 때가 많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는 대체로 더 힘들어진다.

그 사건의 피해자는 지인들의 신고로 범죄 상황에서 구출될 때까지 아무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 지원에 가장 마음을 졸였던 부분은 피해자가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을 듣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피해자는 기억이 없는 동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영원히 가족에게도 비밀로 하려 했던 그 일은 자세히도 세상에 알려졌다. 기사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와서 수백개의 댓글이 달렸다. 대부분 가해자의 엄벌을 원하는 내용이었지만, 여자가 왜 기억이 없도록 술을 마시냐 등 피해자의 마음을 두 번 울리는 나쁜 댓글도 종종 보였다. 피해자 조사 이후 차츰 안정을 찾아가던 피해자는 이 영문을 알 수 없는 기사와 댓글들 때문에 일상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성폭력처벌법에는 ‘피해자의 주소·성명·나이·직업·학교·용모, 그 밖에 피해자를 특정하여 파악할 수 있는 인적사항이나 사진 등을 피해자 동의를 받지 아니하고 신문 등 인쇄물에 싣거나 방송 또는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공개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규정이 있다. 이 규정은 최소한의 마지노선만 담은 것이지만, 딱 이 정도만 준수하면 괜찮다는 기사, 피해자가 누구인지 드러나지만 않으면 상관없다는 식의 기사도 적지 않다.

여성가족부는 성폭력사건 2차 피해 방지를 위해 한국기자협회와 공동으로 ‘성폭력 사건 보도수첩’을 제작·배포했다. 그 안에는 이런 실천요강이 있다. ‘낯선 사람의 접근만으로도 일상적 심리의 평온이 깨지고, 불안함을 느끼는 피해자의 심리상태를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2차 피해인 줄 몰랐다 말하기 전에, ‘내가 이 사건의 피해자라면’이라고 한번 멈춰 생각하는 것, 범죄 피해를 추스르며 또 하루를 사는 피해자에게 꼭 필요한 연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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