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우기는 어려워도

2020.10.27 03:00 입력 2020.10.27 03:03 수정

올해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로저 펜로즈는 블랙홀과 특이점의 존재가 일반상대성 이론의 이론적 결과임을 입증한 수학자다. 중력에 관한 고전적인 뉴턴의 이론을 뒤집는 일반상대성 이론을 창시한 아인슈타인조차도 정작 노벨상은 엉뚱한 광전효과 업적으로 수상했다. ‘실험에 의한 검증’이라는 노벨 재단의 기준에 맞지 않았던 탓이다.

박형주 아주대 총장

박형주 아주대 총장

세월이 흘러 블랙홀과 중력파의 존재가 관측과 실험으로 입증된 마당이니, 그 존재의 필연성을 ‘예언’한 업적이 노벨상을 받을 만하다는 것엔 이견이 없다. 그렇더라도, ‘검증가능한 과학적 발견’에 시상하는 노벨 과학상의 오랜 전통 때문에 초끈 이론과 같은 이론 분야가 노벨상에서 소외되어 왔던 걸 고려하면, 수학자의 수상이 특이해 보이긴 하다.

아인슈타인이 평생의 과학적 업적을 폭풍처럼 쏟아냈던 그의 ‘기적의 해’는 1905년이다. 노벨상 수상의 근거가 된 광전효과와 브라운 운동, 특수상대성 이론, 그리고 원자폭탄의 가능성을 입증한 물질-에너지 등가성에 관한 논문이 모두 이 한 해에 나왔다. 학자로서의 명성을 얻은 그는 1907년에서 1915년에 걸쳐 일반상대성 이론을 완성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수학적 도구의 부족으로 고심하던 그에게 결정적인 돌파구를 제시한 건 수학자 다비드 힐베르트와 취리히 연방공대 동료였던 수학자 헤르만 바일이었다. 실제로 힐베르트는 괴팅겐을 방문한 아인슈타인의 강의를 듣고 즉시 그 의미를 이해하고 리만기하학으로 부족한 부문을 메꾸어 일반상대성 이론을 완성했다. 그런데도 나중에 일반상대성 발견의 공을 전적으로 아인슈타인에게 돌린 건 학자적 윤리성의 규범으로 회자된다.

이미 대가의 경지에 있던 힐베르트와 독립적으로, 그의 제자였던 30대 초반의 헤르만 바일도 일반상대성 이론의 중요성을 알아차렸다. 취리히에서 이에 관해 강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1918년 베스트셀러 <공간, 시간, 물질>을 출간했다. 하이젠베르크가 기념비적 양자역학 업적을 발표하고 3년 후 <군론과 양자역학>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반을 제공한 것도 헤르만 바일이었다. 28세에 <리만 평면의 개념>을 저술한 이 천재도 수년 뒤에 모교인 괴팅겐으로 자리를 옮긴다.

특정한 학문적 방향성을 갖는 학자들의 모임을 ‘학파’라는 표현으로 칭하지만, 수학 분야에서는 흔하지 않다. 괴팅겐 학파는 예외다. 가우스, 디리클레, 리만, 클라인, 민코프스키, 힐베르트, 쿠란트, 뇌더, 바일의 면면을 보면, 근대 수학의 향방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학파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다. 펠릭스 클라인이 수학과 학과장이던 20세기 초의 괴팅겐에서는 ‘공기조차도 수학적 흥분으로 넘쳐흘렀다’고 전해진다.

세우기는 어려워도 무너트리기는 쉽다고 했다. 나치 독일의 등장은 이 모든 걸 순식간에 허물었다. 유대인 과학자의 미국 피신이 이어졌고, 범접 불가였던 괴팅겐 학파의 명성은 숱한 노력에도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아내가 유대인인 바일은 괴팅겐을 탈출한 뒤에 에미 뇌더와 함께 ‘독일 수학자 구출 재단’을 설립하고 독일 과학자의 탈출을 도왔다. 보통의 상황에서 아인슈타인, 바일, 폰 노이만, 괴델 같은 대과학자들을 한곳에 모으는 건 불가능할 텐데, 히틀러 덕에 이들이 모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결집했다. 나치 독일을 탈출한 수학자와 과학자들의 상당수를 받아들인 미국은 과학 강국으로 부상했다. 독일을 탈출한 수학자 폰 노이만은 최초의 원자폭탄을 개발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해 엄청난 규모의 계산을 수행하는 컴퓨터 개발을 통해 프로젝트의 완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수소폭탄의 개발에도 주요 역할을 수행했다.

이런 맥락을 보다 보면, 세계대전의 승리와 전쟁 후 미국의 부상 이면에 역설적으로 나치 독일의 정책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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